고려인(Корё-сарам) 이야기
고려인 이야기
신대광 – 지역사교육연구소
2022년 2월 멀리 지구 반대편 우크라이나에서 전쟁이 일어난 지 1년이 훌쩍 지나고 있다. 우리가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이라 알고 있는 그 전쟁은 그저 먼나라의 전쟁으로 알고 있지만 사실 우리와 매우 밀접한 관련이 있는 전쟁이다. 이 전쟁으로 많은 고려인들이 국내로 피란을 왔다.(현재 우크라이나 국적인 약 5천여 명이 들어왔고, 그중 고려인은 약 4천여 명 정도로 추산하고 있다)
현재 한국의 많은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고려인에 대한 인식은 아직 상식 밖에 머물러 있는 경우가 많다. ‘고려인’이 누구인지 아느냐고 질문했을 때 ‘고려시대 사람들의 후손’ 또는 ‘코리안?’ 심지어는 ‘고려대학교 학생’으로 말하는 사람도 있다.
또는 일부이지만 과거 중앙아시아에 거주하고 있었던 ‘카레이스키’라고 알고 있는 정도이다. 최근 급증하고 있는 고려인 문제가 언론에 보도되고,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을 통해 고려인 피란민을 통해 인식이 조금 나아지기는 했지만, 아직 정확하게 이해하고 하고 있지는 못한 실정이다. 그럼 고려인들은 누구일까? 그들에 대해 아주 간단하게 정리하자면 다음과 같다.
1863년 함경도에 거주하던 한인(韓人) 13가구가 국경을 넘어 연해주로 이동했다. 당시 조선은 세도정치의 극심한 폐해로 망국의 길로 접어들고 있었다. 부패한 조정과 탐관오리의 가렴주구로 농민들에 대한 수탈이 극에 달해 있었다. 거기에 더해 연속적으로 이어지는 가뭄과 전염병의 창궐로 피폐해진 백성들의 삶은 죽음 직전에 이르게 하였다. 이에 함경도에 살고 있던 많은 백성들은 강 건너 이국땅을 바라보게 되었다.
최초로 이주한 13가구는 러시아 정부로부터 허가를 받아 연해주 지역에 정착했다. 이후 소규모 단위의 이주에서 마을 단위의 이주까지 이어지는 사실이 조선에 알려지자 연해주로 넘어가는 한인의 수는 점점 늘어나게 되었고, 연해주에는 한인마을이 생겨나게 되었다. 한인들의 마을까지 형성되자 한인들의 이주는 계속 늘어갔다. 처음 이주한 이들은 새로운 삶을 찾기 위해 즉, 경작지를 찾기 위해 이주한 것이었지만 1905년 을사늑약 이후로는 정치적인 이유로 이주하는 한인들의 수가 증가하게 되었다. 이들은 보다 적극적인 항일 독립 운동을 위해 일본의 영향력이 덜 미치는 연해주로 이주했다. 이러한 이주 형태가 확산됨에 따라 어느덧 연해주는 항일 독립 운동의 근거지가 되었다. 한편 1917년 제정 러시아가 붕괴되고 새로이 소비에트(Soviet) 정부가 출현했다. 그리고 1922년에는 내전이 종결 되면서 소비에트연방(Union of Soviet Socialist Republics, 이하 소련)이 탄생했다. 소련은 출범 초기 국가 전반에 대한 통제를 강화하였다. 이러한 소련의 정치적 상황에 따라 연해주에 있던 한인들에 대한 소련의 통제도 강화되었고, 한인들은 점차 소련화 되어갔다.
1939년 제2차 세계대전이 일어나기 전 전운이 감돌던 1937년 소련은 한인들을 중앙아시아 지역으로 강제 이주시켰다. 당시 연해주에 살던 고려인들이 생김새가 일본인과 비슷하여 일본을 위해 간첩활동을 할 것이라는 우려로 고려인 전체를 이주시키기로 결정하였다. 강제 이주는 소련의 철저한 통제하에 이루어졌다. 그리하여 지금의 중앙아시아 지역(CIS)에 한인들이 이주·정착하게 되었다. 한인들은 그곳에서 새로운 삶의 터전을 개척해 나갔고 현재 까지도 계속 살고 있는데, 이들이 바로 오늘날 고려인으로 불리는 ‘카레이츠(高麗人, Корёсарам)’이다.
해외에 거주하고 있는 고려인은 2018년 기준으로 우즈베키스탄 17.7만 명, 러시아 16.9만 명, 카자흐스탄 10만 명, 키르키즈스탄 2만 명(2019. 9. 24. 외교부 ‘2019 재외동포 현황’) 등 약 50만 명에 이르며 현재 국내에는 약 8만 여명(2019년 법무부 출입국외국인정책본부)이 거주하고 있다. 국내 주요 거주지는 안산(약 20,000여 명), 인천광역시(약 8,000여 명), 광주광역시(15,000여 명) 외 경기도 안성시, 평택시, 경상북도 경주시, 충청북도 청주시, 충청남도 아산 등 전국에 걸쳐 거주하고 있다.
이들은 대부분 외국인으로 등록되어 있으며 이른바 ‘방문취업’이라 불리는 H-2 특례고용허가로 비자를 받고 국내로 들어오거나, 재외동포 F-4 비자로 국내에 입국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이들은 현재 대부분 일용노동직, 파견 근무 등 단기 일자리를 찾아다니며 일을 하고 있고, 안정적인 삶을 원하고 있다. 이렇게 살아가는 가장 큰 이유는 비자로 인한 기간의 문제도 있을 뿐만 아니라 언어 문제로 가장 큰 어려움을 겪고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동포 3세로 입국하는 경우 대부분의 경우 한국어를 할 줄 모르거나 서툴다. 그래서 4세로 한국 학교에 재학중인 학생들은 통번역을 의지하고 있는 상황이다. 뿐만 아니라 주거, 의료, 교육 등 이들을 둘러싼 일상의 문제가 한국 사회에 정착하는데 어려움을 주고 있다. 그리고 내국인들이 이들을 바라보는 시선 또한 따뜻하지 않아 같은 동포로서 인식하지 않고 외국인 노동자로 바라보거나, 다문화로 바라보는 경향이 있다.
자료 출처 : 경기도 체류 고려인의 삶의 질 개선을 위한 정책토론회(2019)
현재 경기도 안산에 거주하고 있는 고려인들은 대부분 안산시 단원구 선부2동, 일명 ‘땟골’이라고 하는 지역에 많이 살고 있는데, 이곳은 안산에 공단이 조성되던 시기 외지의 노동인력을 수용하기 위해 다가구 주택들이 많이 들어선 곳이다. 대부분의 건물이 30년을 넘어섰으며, 약 200여 호의 다가구 주택들이 들어선 곳에서 한 호당 11~15개까지 작게 방을 쪼개어 월세촌을 이루고 있다. 처음에는 이곳에서 가까운 원곡동에 거주하다가, 원곡동이 다문화 거리로 재개발되면서 부동산 가격이 상승하고 포화상태에 이르자 고려인 동포들은 보증금과 월세가 싼 이곳 땟골로 모여들게 되어 자연스럽게 고려인 마을을 형성하게 되었다.
그런데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을 통해 우크라이나 고려인 동포들이 국내에 피란민으로 들어오면서 안산뿐만 아니라 국내 고려인들은 더욱 늘어나게 되었다. 이들이 전쟁을 피해 급하게 피란을 하다보니 모든 것이 급작스럽게 이루어져 겨우 몸만 빠져나오다 보니 각종 행정 서류를 챙길 수 없었다. 그러다보니 한국에서의 생활이 매우 궁핍할 수 밖에 없다. 정부의 지원이 없는 상황에서 초기 민간 지원금으로 살다가 그마저 지금은 전쟁이 장기화 되면서 어렵게 되었다. 이에 현재는 각자 삶을 개척해 나갈 수 밖에 없는 처지가 되었다. 특히 함께 피란 온 아이들은 학교에 들어가기가 더욱 힘들다. 우크라이나 학적 서류가 없어 전입학이 어렵고 한국어가 전혀 되지 않아 이중의 어려움을 겪고 있다. 반면에 독일은 약 100만명이 넘는 피란민을 받아들였고, 루마니아는 65만명을 받아들여 1인당 월 20만원씩 3개월간 지급하고 의료와 교육 서비스를 지원하며 민간시설을 개방하여 살게 하고 있다. 하지만 어렵게 조상들의 고국인 한국으로 피란해 온 우크라이나 고려인들은 정부로부터 일체의 지원을 받지 못하고 있다.
지구 반대편에서 일어난 전쟁이 우리와 전혀 상관없는 전쟁이 아니고, 바로 우리 동포들이 겪는 어려움이기에 우리가 관심을 가져야 한다. 우리가 평화를 바라는 것은 지금 나와 무관한 일이 아니고, 네 이웃의 일이기 때문에 더욱 간절하게 바라는 것이다. 모두가 관심을 가지고 지켜보아야 할 일이다.
살짝 궁금하네요
조선시대 말에 건너간 사람들이 왜 고려인이라 불렸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