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재들의 빛나는 사유와 감각-예술수업
예술수업
천재들의 빛나는 사유와 감각을 만나는 인문학자의 강의실 – 오종우 著 어크로스 刊
“미술작품은 아무런 전문지식이 없어도 감상할 수 있다.” 이는 중학교 때 미술 선생님의 말씀이기도 합니다. 그때 선생님께서는 “사람은 누구나 어떤 작품을 보고 좋다, 예쁘다, 기쁘다, 슬프다 등의 표현을 할 수 있고, 그것을 표현하는 것이 예술감상”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오늘 까마득한 옛날에 들었던 선생님의 말씀을 다시 생각나게 하는 강의가 있습니다. 마치 그 선생님을 다시 만난 것 같은 착각이 들 정도로 강의 결론부에서는 소름이 쫘악~.
‘천재들의 빛나는 사유와 감각을 만나는 인문학자의 강의실’이란 부제가 붙은 『예술수업』 (오종우 著 어크로스 刊)입니다.
저자인 오종우(1965~) 교수는 고려대학교 노어노문학과에서 러시아 문학을 전공했고 동대학원에서 문학박사 학위, 모스크바 국립대학교에서 수학했으며 현재 성균관대학교 러시아어문학과 교수로 있습니다. 그리고 이 책은 성균관대학교에서 한 학기 동안 강의한 내용을 토대로 하고 있습니다.
중학교 때 미술 선생님을 언급했지만 그때나 지금이나 ‘예술’이란 말이 어려운 것은 사실입니다. 아무리 마음 내키는 대로 감상하고 표현한다고 해도 여전히 “예술은 어렵다”는 것입니다. 특히 현대예술은 더욱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어떤 전문지식이 요구되는, 나와는 조금 동떨어진 분야가 아닐까 생각하기도 합니다. 그래서 ‘예술수업’이란 책 제목에 꽂혔나 봅니다. 강의라도 들어볼 요량으로…
실은 ‘이제 대학강의 같은 교양강의를 듣기는 어렵겠구나.’ 생각하던 즈음에 이 책이 눈에 띤 것은 사실입니다. 그때는 강의시간이 지루했는데, 이따금 ‘그 강의실’이 그리워지는 나이입니다.
각설하고, 이 책에서 저자는 예술의 각 분야를 총망라하고 있습니다. 미술이나 음악만이 아니라 소설과 연극, 심지어 현대의 퍼포먼스까지 예술의 제 영역에서 빛을 발하는 예술의 미학, 예술의 역설, 예술이 스며드는 삶에 대해 역설하고 있습니다. 책의 구성에서 돋보이는 것 중 하나는 책 곳곳에 QR코드를 넣어 URL로 연결시켜 음악을 감상하면서 책을 읽을 수 있도록 했다는 점입니다.
예술적 상상력을 통해 보이는 것 너머를 볼 수 있는 시야, 세상을 읽어내는 시야를 넓혀봅시다.
우리가 다양한 예술분야 가운데서 특별히 관심을 보이는 분야가 따로 있을 수 있습니다. 또 예술은 우리 몫이 아니라 우리는 예술작품을 감상하는 자, 곧 예술작품을 감상하고 소비하는 사람으로 인식해온 것도 사실입니다. 그래서 더욱 예술은 우리와 거리를 두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도 했습니다.
그런데 예술에 대한 어떤 선입견도 이 책을 읽어나가는 가운데 저자의 설득력에 먼저 빠져들고 있었습니다.
“예술은 철학과 통하고, 세상의 이치를 가르치는 것”이라고. 천재들의 빛나는 사유와 감각을 만나는 인문학자의 강의실이라는 부제, 곧 빛나는 사유와 감각, 인문학이 한 강의실을 가득 채우고 있다는 것을 말입니다. 예술이 인문학의 전위에 있다는 사실을 저자는 조목조목 제시합니다. 그리고 예술의 역할이 인문학의 그것과 다르지 않으며, 사람의 고뇌와 고통을 이해하고 인간의 가치를 깨우쳐 삶의 의미를 풍성하게 하고자 하는 지향점도 다르지 않음을 이야기합니다.
심지어 현대예술의 자극적인 내용을 혐오스러울 정도로 자극하여 잠들어 있는 감각, 타성에 젖어 새로움을 찾아볼 수 없는 현실에 대한 충격을 던지는 것이라고 설명합니다. 자극이 전달될 때까지.
다음은 책을 익으면서 밑줄 그었던 내용을 요약하겠습니다. 이하는 건너뛰고 직접 책을 읽어보시기를 권해드립니다. 다만 바쁜 일상에 쫓겨 책읽기에 여유가 없는 분들을 위해 내용의 일부를 소개합니다.
p17. 대상을 무조건 기괴하게 비튼다고 예술이 되는 것은 아니죠. 수련 과정을 충분히 거치지 않고 깨달음을 얻지 못한 채, 창의성을 발휘했다는 미명 아래 나온 것들은 대부분 개인의 사적인 과시에 그치고 맙니다. 창의성은 바른 생각, 정직한 자세의 반대편에 있지 않습니다.
p18. 진짜 창의성을 갖추기 위해서는 두 가지 전제조건이 꼭 필요합니다. 먼저, 전문성입니다. 피카소가 대상을 보이는 그대로 정밀하게 그리다가 대상의 진실을 확보하기 위해 자기 예술세계를 열었듯이, 이전부터 축적된 능력을 학습하고 익혀서 전문적인 단계에 이르러야 합니다. 다음으로는, 그 대상을 향한 애착입니다. 애정 없이는 어떠한 대상도 제대로 볼 수 없으며, 그 일을 발전시킬 수도 없습니다. 창의성이 기존의 것을 버리고 또 그 일에 애정을 품지 않아야 집착하지 않게 되어 비로소 발현된다고 여기는 일반적인 생각은 거꾸로 창의력을 죽이는 셈입니다.
p34. 4월은 계절상 봄이죠. 그런데 찬 바람이 옷깃 사이로 스며드는 어느 4월 새벽, 집을 나서면서 “꼭 겨울 같군” 하고 말한다면 그는 이미 예술가입니다. 4월은 봄이라는 통념을 깨뜨리고 자기가 느낀 감각을 다른 계절에 빗대어 표현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자기가 맞닥뜨린 현실’, 곧 그날의 새벽을 능동적으로 표현한 것입니다. 예술을 업으로 삼아 예술가라 불리는 사람들은 단지 그 표현기교가 더 세련되고 더 적극적일 뿐입니다.
p35. 예술을 다루는 학문인 미학을 가리키거나 심미적이란 뜻의 단어에 부정의 접두사를 붙이면 마비, 마취라는 뜻이 됩니다. 예술의 반대말은 추함이 아니라 ‘무감각’인 것이죠.
p35. 자기 삶의 주인이 된다는 것
우리가 사는 세상은 두 개의 영역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실질세계와 여분세계. 현실 세계를 살아가며 먹고 사는 것에 매달리는 것 만큼이나 여분세계 즉 예술과 정신에게 할애해야 할 삶이 있으며, 그 과정에서 자기 삶의 주인이 될 수 있다는 내용입니다.
p45. 우리가 흔히 쓰는 표현 가운데 ‘무슨 일이든 받아들이기 나름이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 일상어는 꽤 복잡한 철학을 쉽게 접근 할 수 있게 해줍니다. 이 표현을 풀어보자면, 어떤 사물이나 상황은 받아들이는 관점에 따라 그 사람에게 다른 의미를 안겨준다는 뜻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나아가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즉 아무 관심이 없다면 그 사물이나 상황은 그에게 의미가 없이 존재하지 않는 것과 다를 바 없다는 뜻까지 포함합니다. 우리가 예술에 관심을 가져야 하는 이유입니다.
p55. 톨스토이의 초상의 비밀
니콜라이 게의 톨스토이 초상화는 작가가 글을 쓰고 있는 순간을 스냅사진처럼 묘사했는데…
서재의 좁은 책상을 클로즈업한 이 그림에서 톨스토이는 온 정신을 작품에 쏟아붓고 있습니다. 지금 톨스토이는 어디에 있을까요. 화려한 궁전의 파티, 광활한 보로디노 전장, 말을 타고 있는 나폴레옹, 애절한 사랑에 빠진 안나 카레니나의 마음… 톨스토이가 쓴 작품을 전집으로 묶었더니 90권이나 되는데, 아마도 지금 그는 그 어딘가에 있을 겁니다.
니콜라이 게가 그린 톨스토이 초상은 톨스토이의 찌푸린 미간, 꼭다문 입술, 내리깐 눈에 그치지 않고 그의 머릿속에 펼쳐진 광활한 서가의 세계, 거기에 담긴 깊은 정신 세계입니다.
p109. 농인(聾人)은 원래 청각장애인을 낮춰 부르는 말이 아니었습니다. 지금은 듣지 못하는 사람을 가리키는 단어로 바뀌었지만 본래 ‘듣는다’는 뜻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농이라는 글자를 다시 볼까요. 용의 귀라는 단어입니다. 용의 귀를 가졌기에 사람의 소리는 못 듣지만 용이 듣는 다른 소리를 듣는다는 겁니다. 예술적인 상상력이 포함돼 있죠. 말하자면 농인에게는 일반인과는 다른 소리가 있을 거라는 상상이 포함되어, 그를 단순히 장애인이라고 업신여기는 것이 아니라, 어떤 점에서 신비롭게 보며 존중하고 이해하는 것입니다.
베토벤은 청력을 완전히 상실하고도 <합창교향곡>을 썼으며, 그후 현악4중주 여섯곡을 더 남기고 세상을 떠났습니다.
p117-147 불완전한 인간의 완전한 비극 – 햄릿과 오이디푸스
To be, or not to be, that is the question. 이는 전통적으로 “사느냐 죽느냐 그것이 문제로다”로 번역합니다. 그런데 햄릿을 연구하는 사람들은 아주 다양하게 해석합니다. 원문을 흡족하게 전달하려는 노력의 일환이지만 그만큼 번역의 어려움을 말해주는 것이기도 합니다. 햄릿의 대사 ‘사느냐’는 목숨을 잃을지언정 진실에 따라 제대로 존재한다는 뜻이고, ‘죽느냐’는 진실을 묵살하고 비겁하게 목숨을 부지하는 것으로, 살긴 살지만 죽은 것과 다를 바 없는 상태를 뜻합니다.
오이디푸스의 경우입니다. 아버지인 부왕을 죽일 것이라는 신탁에 의해 버려져 다른 환경에서 자란 오이디푸스는 테바이의 왕(아버지)을 죽이고 그 왕비(자기 어머니)를 취함으로, 자식들의 아버지이면서 형제이고 아내의 남편이자 아들로서 선왕이자 아버지인 라이오스를 살해한 자가 되었습니다. 인간에게 이보다 더한 고통과 번뇌가 있을까 하는 생각에 온몸이 서늘해집니다. 더구나 오이디푸스는 아무 잘못도 없는데 말입니다. 비극은 이처럼 도저히 견딜 수 없는 고난과 슬픔을 다룹니다.
그리고 비극은 역설적으로 난관에 부딪힌 인간, 신과의 싸움에서 질 수밖에 없는 인간의 옳은 결정을 보여줍니다. 오이디푸스는 현실을 직면하여 자기가 처한 위치를 확인하고는 자기 눈을 찌르고 황야로 나갔습니다. 그는 자기에 불리함에도 끝까지 진실을 파헤쳤고, 신탁(운명)에 휩쓸렸지만 결코 타협하지 않았습니다. 오이디푸스는 부당한 운명을 끝내 벗어나지 못했지만 굴복하지는 않았습니다. 이처럼 영웅은 슈퍼맨이 아니라 극한의 상황에서도 인간의 가치를 보존하는 인물을 뜻합니다.
p184. 모네의 그림에서 가치 있는 것은 수련, 다리, 연못이 아니라 그것을 바라본 화가의 시선입니다. 세잔의 사과와 오렌지 정물이 뛰어난 그림인 까닭은 사과와 오렌지가 귀해서가 아니라 그것을 보는 시선 자체가 빛나기 때문입니다.
p198. 사랑하는 사람이 몹시 보고 싶을 때 여러분은 증명사진처럼 정면에서 포착한 그/그녀의 얼굴을 떠올리나요. 아니지요. 정지된 사진처럼 고정된 그/그녀를 떠올리지는 않을 겁니다.
이것이 대상을 바라보는 진실한 시선입니다. 이는 우리가 원래부터 지닌 시선인데, 피카소가 새삼스럽게 지각시켜주었습니다.
p211. 왜 사랑하는지 묻는다면 샤갈은 뭐라고 대답할까요. 그의 그림들을 보고 있으면 그가 이렇게 말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이유가 있어서 사랑하는 것은 아니니 사랑이 뭔지 말하기 어렵다고. 진정한 사랑이란 왜 사랑하는지 그 까닭은 알지 못해도 살아가는 많은 이유를 만든다고. 사랑은 아마도 그런 것일 겁니다.
p295. 눈이와서 멜랑콜리하다고 하면, 눈의 의미는 멜랑콜리에 갇힙니다. 그 이상, 내리는 눈이 주는 느낌은 사라지죠. 눈이 와서 불편하다고 하면 미끄럽고 질척한 길만 떠올리게 됩니다. 더는 생각이 나지 않습니다. 규정해서 내린 결정에 현실이 갇히는 꼴입니다.
그렇지만 단순하게 가볍게 “눈이 내린다”고 하면 오히려 단순하지 않게 여러 의미를 줍니다.
p304. 죽은 토끼에게 어떻게 예술을 설명할까 – 퍼포먼스
요제프 보이스의 ‘죽은 토끼에게 어떻게 그림을 설명할까’라는 작품이 있는데 죽은 토끼를 품에 안고서 세 시간에 걸쳐 그림들과 예술에 대해 설명하는 퍼포먼스였다고 합니다. 이 의미는 완고하게 자기 생각에 갇혀 있는 사람들보다 차라리 죽은 토끼에게 예술을 설명하는 편이 더 낫다는 표현이었다고 합니다.
자기 학대와 비하로 참을 수 없는 모욕을 느낄 때까지 퍼포먼스를 벌여 불쾌한 현실을 충격적으로 체험하게 했다는 폴 메카시의 이야기도 나옵니다. 참으로 예술가는 세상의 부조리와 무감각을 못견뎌 하는구나 싶습니다. 또 깨어 있는 지성, 깨어 있다고 자부하는 자의 숙명이겠지요.
p333. 같은 시대를 살면서 그 속에서 노예인지도 모르고 노예처럼 사는 사람과 자기 삶의 주인이 되는 사람이 풍기는 향기는 다릅니다. 삶의 질도 달라집니다.
예술작품을 대하면서 길러진 해석능력, 그리고 창의성과 상상력은 세상을 읽어내는 시야가 넓어지며, 삶에서 부딪히는 여러 문제를 감당해낼 수 있는 힘이 될 것입니다.
저도 한번 읽어볼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