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마당신대광의 역사읽기

백정 박성춘과 아들 박서양의 평등인권운동과 독립운동

신대광 (역사교육 84)

가장 낮은 자에게 찾아온 낯선 세상 

1876년은 우리 역사에서 상징적으로 큰 의미를 가지는 해이다. 바로 ‘조일수호조규’가 체결된 해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흔히 ‘강화도조약’으로 알고 있는 이 조ㆍ일간의 조약은 조선을 소위 ‘근대’라고 하는 이전과는 전혀 다른 새로운 세상으로 인도했다. 그런데 우리의 근대는 정신사 측면으로 보나 문명사 측면으로 보나 그다지 새롭거나 아름답지 않았고, 오히려 혹독한 시련을 가져다준 근대였다.

 그 해 이후 조선 사회는 큰 변화를 겪기 시작하는데, 이는 일본을 통해 ‘서양’이라는 새로운 세상을 접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물론 부분적으로는 당시 중국 청나라를 통해 서양을 접하기도 하였지만, 그것은 일부에 그쳤고, 대부분의 백성들이 경험한 근대는 놀라움과 충격이었다. 이후 조선 사회는 급격한 변화의 소용돌이 속에 혼란의 연속이었다. 1882년 임오군란, 1884년 갑신정변 등 크고 작은 일들이 연속적으로 발생하면서 내일은 고사하고 오늘 세상이 어찌 돌아가는지 정신을 차릴 수 없을 정도였다. 그 혼란 중에 큰 사건이 동시에 3건이나 터지는 해가 있었으니 그 해가 바로 1894년 갑오년이다. 1월부터 전라도 고부에서 관리의 탐학에 맞서 농민들이 들고일어나 거국적인 저항운동으로 진행되는 동학 농민 운동이 일어났고, 이를 해결하지 못한 정부는 결국 청나라에 원병을 요청했다. 이로인해 조선에 청 군대와 일본 군대가 동시에 주둔하면서 청일전쟁이 일어나 전국은 또다시 국제 전쟁의 소용돌이에 빠지게 되었다. 이런 와중에 정부는 새로운 개혁을 발표하는데, 이것이 바로 ‘갑오개혁’으로 정치ㆍ경제ㆍ사회 등 여러 분야에서 많은 개혁 조치들이 시행되었다. 이 시기를 경험한 당시 사람들은 자고 일어나면 새로운 일이 하나씩 터지면서 하루하루가 어리둥절한 나날이 아니었을까 생각한다. 

 갑오개혁은 조선 500년 역사에서 정말 큰 변화를 보여준 개혁이었다. 이 개혁이 비록 일본의 영향력이 깊게 반영된 개혁이었지만 가장 중요한 내용 중 하나는 바로 ‘신분제 폐지’가 아닌가 생각한다. 단군의 고조선 성립 이후 수천 년간 존재했던 이 땅의 신분제가 비로소 철폐되는 것이니 어찌 천지개벽이 아니라 할 수 있겠는가? 

 신분제 폐지는 비록 법적인 조치여서 실생활에서 느끼는 체감은 그리 와닿지 않았다고 하지만 이는 신분제의 상층에 있던 사람들의 인식이고, 신분제의 하층에 있던 사람들은 비로소 새로운 세상을 만난 것이었으리라 본다. 여기 그것을 누구보다도 절실하게 체득한 사람이 있었으니 그가 바로 조선에서 제일 천하디 천한 신분으로 살았던 백정 박성춘이다.   

동학농민운동과 갑오개혁

사람 위에 사람 없고 사람 아래 사람 없다

백정 박성춘은 원래부터 이름이 박성춘이 아니었다. 백정에게 무슨 성(姓)과 명(名)이 있었으랴. 그저 박가(朴家)라고 불렸을 뿐이었다. 그는 현재 종로2가 관철동 인근의 관잣골에서 태어나 평생 백정이라는 굴레를 업고 살았다. 조선시대 백정은 일곱 천민 중 하나로 그 중에서도 가장 낮은 신분이었으며, 그들에게 씌워진 주홍 글씨는 왕조 500여 년 동안 지워지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청일전쟁의 난리 속에 전국적으로 콜레라가 창궐하는 등 전염병이 만연할 때 박성춘도 장티푸스에 걸려 사경을 헤매게 되었다. 그의 아들 봉출은 아버지의 상태가 심각하다는 것을 알고 자기가 다니던 예수교 학당을 찾아가 도움을 요청하였다. 이 학당은 1892년 미국 북장로회 소속 사무엘 포먼 무어 선교사가 제물포를 통해 조선에 들어온 후, 1893년 3월 서울의 곤당골에 교회(곤당골교회, 현 승동교회의 전신)를 설립하고 세웠다. 그리고 그 학당에서 신분을 가리지 않고 학생들을 가르쳤다. 이때 박성춘도 아들에게 자신의 천업을 물려주지 않기 위해 그 학당에 보냈었다.

 아버지의 병 때문에 아들 봉출의 손에 이끌려 사무엘 선교사와 함께 찾아온 이가 있었으니 그가 바로 제중원 의사 에비슨이었다. 그런데 당시 에비슨은 고종 황제의 주치의로서 시의(侍醫)의 위치에 있었다. 백정들이 사는 마을은 일반인조차 출입을 꺼리는 곳인데, 조선인도 아닌 외국인 의사가 그것도 나랏님의 옥체를 살피는 어의(御醫)가 찾아왔으니 놀라고 놀랄 일이었다. 에비슨의 치료로 박성춘은 곧 원기를 되찾고 병상을 털고 일어나 일상을 되찾게 되었고, 이를 계기로 곤당골 교회를 다니기로 마음 먹었다. 그는 아들과 함께 곤당골 교회를 찾아 세례를 받고 ‘새봄을 맞아 새사람이 되었다’는 이름의 박성춘으로 바꾸었다. 그리고 아들의 이름도 봉출에서 ‘상서로운 태양이 되라’는 의미의 서양(瑞陽)으로 바꾸어 준다. 비로소 새로운 세상에 눈을 뜨게 된 것이다.

 박성춘은 1895년 4월 당시 내무아문의 내각총서로 있던 유길준에게 탄원서를 보내 신분제가 폐지되었으니 백정에게도 평등한 인권을 인정해 달라는 ‘백정 차별 금지법’를 공포하고 갓과 망건을 사용할 수 있게 해 달라고 요구하였다. 그 요구는 받아들여져서 백정들도 갓과 망건을 하고 길거리를 활보할 수 있게 되었다. 거의 500여 년 만에 일어난 일이었다. 이후 박성춘은 1898년 10월 29일 독립협회에서 주최한 관민공동회의 수많은 사람들이 모인 자리에서 연단 위에 올라 자신의 정치적 견해를 밝혔다. 바로 옆에는 정부의 지체 높은 관리들이 앉아 그의 연설을 듣고 있었으니 세상이 참 많이 변하고 있었다.

관민공동회에서 연설하는 박성춘

백정의 아들로 태어나 의사가 되고 독립운동을 하다

백정 박성춘의 아들 박서양은 어려서 아버지의 혜안(?)으로 사무엘 선교사의 예수교 학당에 다니며 공부를 하게 되었다. 당시 학당은 신분의 차별을 두지 않았다. 박성춘은 자신의 병 치료에 도움을 받은 에비슨에게 이후에도 아들의 공부를 위해 간절하게 의탁했다. 이 땅의 모든 아버지의 바램은 신분을 초월하여 똑같은 마음이리라. 

 당시 에비슨은 제중원의학교(세브란스병원 의학교)를 담당하고 있었는데, 아버지와 친분이 있다고 선뜻 아들 박서양의 입학을 허락하지 않았다. 한동안 제중원의 청소, 침대 정리 등 허드렛 일을 시키며 조용히 지켜보았다. 박서양이 불평없이 모든 일을 잘 해내자 비로소 의서를 읽도록 허락했다. 그렇게하여 박서양은 정식으로 의학공부를 하게 되었고, 1908년 제중원의학교 제1회 졸업생이 되어 정부 내부(內部)로부터 의사 면허증인 ‘의술개업인허장’을 받았다. 백정의 아들이 우리나라 최초의 서양 의사가 된 것이다. 

1908년 제1회 제중원졸업식

이후 박서양은 학교에 남아 화학과 해부학을 가르쳤으며, 황성기독청년회(YMCA)에서 학생교육을 담당하기도 하였고, 중앙학교, 휘문학교, 오성학교 등에서 생물학과 화학을 가르치기도 하였다. 한편 그가 졸업한 모교가 1913년 세브란스연합의학교로 개칭된 이후에는 학교에서 강의를 하면서도 외과에서 부의사로서 임상 경험도 쌓았다. 

 그러던 1917년 어느 날 훌쩍 간도로 이주하였다. 그는 간도 연길현에 구세병원을 개업하였다. 당시 그곳에 한국인 의사는 그가 유일했으며 연인원 1만여 명의 환자를 진료하였는데, 3분의 1은 무료 진료를 하였다. 그 와중에 숭신학교를 세워 직접 교장이 되어 교육 활동에도 전념하였으며, 훗날 만주지역에 조직된 독립운동 단체인 대한국민회의 군사령부 군의관으로 활동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만주지역에서 일제의 탄압이 거세어지자 그동안의 활동을 접고 1936년 한국으로 귀국하였다. 후에 황해도 연안에서 개업을 하였다가 1940년 경기도 고양으로 이사한 후 얼마 후 55세의 나이로 영면하였다. 정부는 2008년 그의 독립운동을 기려 건국포장을 수여하였다. 

세상에서 가장 낮은 자로 천하게 태어난 박성춘, 그는 인간이 평등함을 알게 되었고 이를 실현하기 위해 그의 동료인 백정들과 함께 불평등한 세상과 싸웠다. 그런 아버지 슬하에서 자란 박서양은 의술을 통해 세상의 가난하고 배우지 못한 이들을 위해 헌신하는 삶을 살았다. 의사로서 개인의 삶에 안주할 수 있었지만, 당시 조국이 처한 현실에도 눈감지 않았다. 

 우리가 세상을 살면서 어디를 바라보고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 이들 부자의 삶이 오래전에 말해 주었다. 

백정 박성춘과 아들 박서양의 평등인권운동과 독립운동”에 대한 4개의 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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