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마당최병일의 여행맛집

월정사, 상원사 천년고찰이 주는 겨울 서정

여행을 떠나면 때때로 예기치 않은 일들과 마주치게 된다. 돌발적인 사고가 아니더라도 생각하지 못한 일이 발생하거나 변덕스러운 날씨 때문에 고생하는 일이 흔하다. 하지만 그 모든 것이 여행의 일부라고 생각한다. 평창으로 여행을 떠났다.

햇살이 잠시 두터운 구름을 뚫고 대지를 비추는가 싶더니 가랑비가 오고, 다음날은 안개가 도시를 포위했다. 그 돌발적인 우연이 만든 겨울 서정이 더 즐거웠다. 강원 평창은 안개로 인해 사뭇 낭만적이었고, 월정사 전나무길은 신비로운 공간처럼 느껴졌다.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 여행도 결국 마음먹기 나름인 것 같다.

겨울 서정 1번지 전나무 숲길

평창 여행의 백미는 역시 오대산이다. 해발 1563m의 비로봉을 주봉으로 호령봉, 상왕봉, 두로봉, 동대산의 다섯 개 봉우리 아래 월정사, 상원사를 비롯한 수많은 사찰을 품고 있는 산이다. 오대산은 신라시대 자장율사가 전국을 순례하다가 당나라 오대산과 산세가 비슷하다며 붙여준 이름이다. 비로봉에서 평창 쪽으로 내려가는 오대산 지구와 계방산 지구는 부드러운 흙산으로, 산수가 아름답고 문화 유적이 많다.

월정사 전나무길, 선재길…순백 눈길에 발자국 새기며 겨울도 느릿하게 걷는다

오대산 자락에 있는 월정사로 들어가려면 전나무 숲길을 넘어가야 한다. 전나무 숲길은 ‘월정대가람(月精大伽藍)’이란 현판이 걸려 있는 일주문부터 대략 1㎞ 정도의 소슬한 산책길이다. 숲길은 S자로 굽어 있다. 길 초입에는 월정사 단기출가 프로그램 참가자들이 머리카락을 잘라 모아놓은 삭발탑이 서 있다. 세속의 삿된 마음을 내려놓고 진리의 세계로 향한다는 의미가 담겨 있다. 지금은 숲길이 됐지만 원래 월정사 전나무는 아홉 그루에서 시작됐다고 한다. 수령 500년을 넘긴 전나무들이 씨를 퍼뜨려 숲을 이룬 것이다. 전나무 숲길은 드라마 ‘도깨비’에서 공유(김신 역)가 김고은(고은탁 역)에게 사랑을 고백했던 낭만적인 길이기도 하다.

눈밭 속에서 전나무 둥치는 굵은 붓으로 힘차게 찍어낸 먹빛이었고, 실핏줄 같은 가지마다 설화(雪花)가 만발했다. 눈의 무게로 휘어진 가지에서는 이따끔 풀썩 눈이 쏟아져서 바람에 흩어졌다. 순백으로 포위된 침묵의 숲. 아는 이들은 안다. 눈 내린 직후의 숲이 얼마나 고요한지, 눈이 얼마나 깊은 진공의 침묵을 만들어내는지를….

그 적막의 숲길 저쪽 끝에서 스님 셋이 숲길로 걸어들어왔다. 아마도 깊은 산사에서 수도의 긴 시간을 함께 하고 있는 도반(道伴)들이리라. 뽀드득…. 순백으로 적막한 세상에 묵언의 스님들이 딛고 가는 눈밟는 소리. 마음을 수시로 어지럽히곤 했던 색깔들이 다 지워진 무채색의 길. 스님 셋이 나란히 낸 첫 발자국을 먼 발치서 따라가다가 왜 갑자기 그 문장이 떠올랐을까. ‘눈 쌓인 길 갈 때 함부로 어지러이 걷지 마라, 오늘 내가 가는 자취가 뒤에 올 사람의 이정표가 될지니….’(서산 대사의 ‘답설(踏雪)’)

500년의 시간을 건너온 아름드리 전나무 사이로 스님들이 이른 아침 눈밭에 찍어놓은 발자국 앞에서 ‘모든 것의 처음’의 모습을 생각한다.

월정사는 자장율사가 신라 선덕여왕 12년(643년)에 창건했다고 전해진다. 사찰로 향하는 가장 아름다운 길로 꼽히는 전나무 숲길을 넘어 당도한 월정사는 생각보다 소박하다. 위압적이지도, 화려하지도 않다. 간결하면서도 담담한 절집이다. 사찰 안에 품은 보물들이 많아서일까. 화강암으로 만든 팔각구층석탑(국보 제48호)은 고려시대 최고의 석탑으로 손꼽힌다. 전신이 날씬하게 위로 솟은 모양에, 윗부분의 금동 장식이 기품을 더한다. 탑 앞에 두 손을 모으고 공양하는 자세로 무릎을 꿇은 석조보살좌상(보물 제139호)의 매력적인 미소가 인상적이다.

깨달음 찾아 떠나는 선재길 산책

월정사 전나무길, 선재길…순백 눈길에 발자국 새기며 겨울도 느릿하게 걷는다월정사에서 상원사까지는 8.8㎞, 빠르게 걸어도 3시간 넘게 걸린다. 이 길을 선재길이라고 부른다. 원래 선재길은 1960년대 말 월정사와 상원사 사이에 도로가 나기 전부터 스님과 신도가 오가던 비밀스러운 숲길이었다. 화엄경에서 불교의 진리를 찾아 천하를 돌아다니다 보현보살을 만나 마침내 득도한 ‘선재동자’에서 이름을 따왔다고 한다. 월정사 부도밭에서 시작된 선재길은 평탄한 데크와 뽀드득한 눈을 밟으며 산책하듯 갈 수 있다. 중간중간 쉼터가 있고 물이 있던 자리마저 눈이 가득해 운치가 있다.

선재길 끝에 있는 상원사는 월정사보다 규모는 작지만 다양한 이야기를 품고 있다. 신라 신문왕 시절 보천·효명 두 왕자는 불법에 뜻을 품고 오대산으로 들어갔다. 형 보천은 진여원이라는 이름의 암자를 짓고 수도했고, 동생 효명은 북대 자리에 암자를 짓고 수도 정진했다. 두 왕자가 모두 출가하자 신문왕은 사람을 보내 형제에게 왕위를 이어줄 것을 간청했다. 보천은 끝내 거절했고 동생 효명이 왕위를 계승했다. 보천이 기거하던 진여원이 지금의 상원사다. 선재길은 상원사에서 끝나지만, 상원사의 산내 암자인 적멸보궁(보물 제1995호)까지 만나야 마침표를 찍을 수 있다. 석가모니의 진신사리를 모신 적멸보궁은 작은 불당과 사리탑이 전부지만 부처님의 흔적을 느끼고 싶은 불자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 곳이다.

상원사 여행을 마치고, 다음날 선자령으로 향했다. 평창군 대관령면과 강릉시 성산면 사이에 있는 선자령은 겨울 풍광이 빼어난 트레킹 명소다. 해마다 걸었던 길을 안개가 가로막았다. 떼는 걸음마다 안개가 치덕거리며 발목을 잡았고 앞서가던 등산객은 안개 속에 흔적 없이 사라졌다. 한 길 앞도 보이지 않는 산길을 헤매다 돌아 나오니 하늘은 어느새 푸른 빛을 띠고 있었다.

봉평 먹거리

봉평에는 메밀 맛이 제대로 살아 있는 막국수 맛집이 많다. 미가연은 미가면, 메밀싹 육회, 메밀싹 비빔밥, 메밀싹 육회 비빔국수 특허를 보유하고 있다. 메밀 명장인 오숙희 씨가 직접 개발했다. 최근 일반 메밀보다 루틴(비타민P)이 70배나 많은 메밀을 이용해 ‘이대팔 쓴메밀국수’를 선보였다.

글 사진 최병일 여행작가

월정사, 상원사 천년고찰이 주는 겨울 서정” 에 달린 1개 의견

  • 정성우(신학85)

    몇 년전 선재길을 걸어 내려온 경험이 있지.
    다소 긴듯 했지만 계곡을 넘나 들며 걷던 그 길의 운치가 아직도 눈에 선하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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