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리스마스의 추억
크리스마스의 추억 – 이경희(유교88)
1981년 12월 25일, 경기도 파주.
서로가 부끄러워 입에 올리기도 꺼려했던 ‘창골’이라는 이름의 작은 마을에 제법 규모가 큰 쌀가게가 하나 있었습니다. 계단을 오르면 알루미늄으로 만든 엉성하기 짝이 없는 현관문이 하나 나타나는데 문을 열면 별다른 인테리어라고는 없는 네모난 공간에 낡은 강대상과 풍금 한 대가 덩그러니 놓여 있고, 자줏빛 암막커튼 위로는 나무십자가가 걸려 있어 대번에 교회라는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살림집을 따로 임대할 수 있는 형편이 아니다보니 커튼 뒤로 얇은 나무판으로 짠 책장이 가림 막이 되어 3평정도 다섯 식구의 살림살이가 나름 짜임새 있게 놓였습니다.
멋이라고는 하나도 없는 인정머리 없는 건물이었지만 넓은 옥상을 마음껏 사용할 수 있어서 좋았습니다. 친구들과 마음껏 뛰어놀아도 층간소음문제로 대낮에 연장을 들고 쫓아올라오는 일 따위는 없었고, 벽면 전체가 커다란 창으로 시원하게 밖을 향해 열려있어 햇살이 가득했다는 것이 큰 장점이었습니다. 단점도 장점만큼이나 많았는데, 가족만의 공간이 없어 사생활이 전부 노출된다는 것은 치명적이었습니다. 그 외에도 공간이 분리되어 있지 않다보니 아버지의 목회는 24시간 365일 풀가동이었습니다.
손자를 볼 나이가 된 지금도 가끔 악몽시리즈 중 하나로 등장하는 것이 바로 그곳의 화장실입니다. 재래식 화장실이 대부분이었던 그 시절에 수세식변기가 있어 편리하긴 했지만 그 세련된 화장실은 계단을 따라 내려가 큰길에서 훤히 보이는 1층 연탄창고 안에 있었습니다. 그렇다 보니 난방도 되지 않은 그곳에서 시커먼 연탄을 마주보고 볼 일을 봐야했고, 내가 언제 화장실을 가는지 까지 세상에 노출되었습니다. 아마도 나의 변비는 먹은 것이 없어서가 아니라 화장실 때문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세월은 흘렀고, 지금은 그곳에서의 모든 것이 추억이 되었습니다. 이웃을 향한 사랑과 섬김이 가득했던 아버지, 이웃을 위해 쉬지 않고 일하셨던 지금의 나보다 젊었던 어머니, 이제는 만날 수 없는 그 시절의 사람들로 인해 더욱 그립습니다. 사람들 외에도 사라진 좋은 것들이 참 많습니다. 가장 아쉬운 것은 교회에서 이웃과 함께 격 없이 한 가족처럼 먹고 마시며 함께 했던 많은 것들입니다. 남루한 공간이었지만 사랑이 넘쳤습니다. 부활절, 추수감사절, 성탄절은 마을의 잔치였습니다. 모든 절기가 특별했지만 크리스마스에 관한 추억은 좀 더 특별한 것 같습니다. 성탄절 이브에는 아이들에게 공식적으로 교회에서의 외박이 허락되었던 날이었습니다. 방석을 줄 세워 침대삼고 외투를 이불 삼아 쪽잠을 청하는 청년들도 있었지만 대개는 밤을 지새우게 될 이벤트에 설레어 잠을 이루지 못했습니다.
영화를 보거나 윷놀이를 하며 밤을 지새우다 커다란 가마솥에서 떡국을 끓여내면 김장김치와 함께 뚝딱 비워내고 소복소복 쌓인 눈길 위를 조심조심 걸었습니다. 북에서 오는 찬 공기와 임진강에서 넘어오는 찬바람에 코가 빨개지고 손과 발이 꽁꽁 얼어도 설레는 마음으로 마을을 한 바퀴 돌았습니다.
10살 아이에게는 ‘새벽 미션’을 완수했다는 뿌듯함보다 자루에 가득 채워지는 먹을거리에 대한 감동과 뿌듯함이 컸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초코파이 하나 호빵 하나, 새우깡 한 봉지도 특별했던 그 날, 배고픔에 대한 설움을 모두 잊게 해 줄 만큼 달달한 쵸코파이가 자루 안에서 말을 거는 것 같았을 것입니다. 새벽 송을 마치고 교회로 돌아와 꽁꽁 언 몸을 녹입니다. 성탄축하예배를 몇 시간 앞두고 모두가 잠든 그 시간, 잠들지 못하는 아이는 슬그머니 일어납니다. 가슴이 쿵쾅쿵쾅 요동치지만 크리스마스트리 앞에 모여 있는 자루 안에서 눈여겨보았던 쵸코파이 한 상자를 들었다 놓았다 합니다. 십자가의 불빛을 애써 외면하며 한 발짝을 떼고 나니 발에 힘이 좀 생깁니다. 결국 그 상자는 아이의 가방 속으로 들어갑니다. 모든 행사가 끝날 때 까지도 온통 초코파이 생각뿐입니다.
초코파이를 절도한 촉법소년이 지금은 입에 대지도 않는 그 초코파이를 생각합니다. 꿀보다 라면보다 좋았던 그 시절의 초코파이가 없어서 슬프기도 하지만 내 삶에는 늘 다른 쵸코파이가 있었던 것도 같습니다.
선배님 뵌지가 꽤 오래 되었네요. 성탄 글을 읽으며 선배님의 추억 한자락을 공유하게 되는 것 같아 좋습니다. 자주 뵙지는 못하지만 선배님 생각할 때마다 항상 강건하시길 기도합니다 ^^
동네 사랑방이자 공동 어린이집이었던 교회를 찾아 보기가 점점 더 힘들어 지네.
풍족 해서가 아니라 오히려 부족해 서로 보듬었던 그 시절이 경희의 노스텔지아 인가 보다.
그립지만 왠지 알싸한 감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