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이 급격히 변해가고 삶에 찌들어가면서 ‘크리스마스’라는 감흥도 아련해지는 것은 나만의 생각일까. 흔했던 크리스마스 캐롤도 일부러 찾아 듣지 않으면 겨우 방송에서 한두 번 들을까 말까. 특히 아이들이 자라자 더욱 더 멀어져 버린 듯 하다.
모두들 많은 추억들을 회상 할 수 있겠지만 나에게도 크리스마스 회상의 조각들은 있다. 그 중 1981년 겨울. 아...생각해 보니 참 살벌했던 시절이었네.
그해 크리스마스 시즌은 내가 다니던 교회 중고등부 주최로 ‘불우이웃을 위한 자선 엿팔기’를 12월 크리스마스 전까지 토요일 오후에 진행하게 됐다. 하지만 행사 진행 전부터 잔잔한 불협화음도 있었다. 유년주일학교부터 올라온 아이들과 중간에 입회한 아이들, 그리고 각 학교와 친분으로 엮여 단합이 좀 어려웠다. 나만 교회를 친구 따라 다니다 중학교 졸업 후 교회를 안나갔는데 미션스쿨이었던 고등학교에서 성경시간에 교목에게 매주 혼나게 되자 같은 반 친구 권유로 잠실 집에선 멀었지만 이 교회에 등록하여 11월 총회에서 학생회장이 됐으니 나의 호감도는 극과 극이었다. 신임회장으로 솔선수범도 필요했지만 의욕과 열정은 넘쳤다. 중고등부 40여명 중 임원들 중심으로 뜻 맞는 10여명이 3~4개조로 나누어 중곡4동을 중심으로 구의동, 능동 일부지역까지 ‘엿’을 팔았다.
모두들 교복을 단정히 입고 고등부 2명과 중등부 서너명은 담당 구역내 교인들과 상가지역을 돌며 ‘엿’을 팔았다. 기억하다시피 11월 하순이후가 되면 상점곳곳에 트리 및 깜박등과 더불어 캐롤과 신나는 음악이 흘러 나름 분위기는 좋았다. 나는 판매대를 목에 걸고 우리조원들과 중곡동 지역을 담당했다. 상점에 들어가서 모두들 정중히 “안녕하십니까” 인사하고 취지를 설명하면 웬만하면 “기특하네”하며 1~2개씩은 팔아주었다. 가격은 정해지지 않아 몇 백원도 안될 자그마한 엿을 지폐 한장 가격이상을 받았으니 당시 지하철이나 버스안의 강매(?)와 비슷한 수준이었다. 하지만 예나 지금이나 모두에게 환영받을 순 없었다. 인사하자마자 욕먹고 네 쫓기며 일장 훈시까지... 내 어린 마음에 서운함과 더불어 그 상점에 번쩍이는 트리장식이 얄밉게 보였다. 칭찬받고 몇 개 팔면 의욕 오르고 문전박대 당하면 풀이 죽고 우리 마음은 롤러코스터를 탔다. 그래도 손에 손잡고 기도하며 맘 다지고 위로하여 맘 풀리면 언제 그랬던가 깔깔거리며 모두들 해 맑게 웃고들 했다.
찬바람의 겨울저녁 발그레진 볼과 곱아진 손을 어루만지고 비비며 참 순수하고 착했던 그 친구들 다들 어디서 어찌 살아가는지 궁금하다.
‘엿팔기’행사를 마치고 결산하니 생각보다 큰 수익을 내어 포장쌀 30여개를 구입, 크리스마스 당일 오후에 중곡2동 어려운 주민들을 한 집 한 집 찾아가 전달했다. 행사와 겉치레가 아닌 행사 전부터 교인과 더불어 지역탐방을 통해 눈에 점찍었던 허스름 한 집을 찾아가 진심을 담아 드렸다. 그래서 사진 한 장안 찍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목사님이나 전도사님 부장집사님의 간접적인 도움도 많았지만 크게 간섭하지 않고 이끌어 주시며 학생회가 원하는 대로 해주셨던 것도 대단 한 것이란 생각이 든다.
나와 우리만 생각하지 않고 순수한 시간과 노력을 통해 나눔을 했던 그 순수했던 학생회 시절 그 친구들. 암울하고 삭막했던 80년대 진정 이 땅에 평화와 사랑을 기원했던 작은 소망의 씨앗들이었을 것이다.
새벽송 돌면서 얻어온 간식거리들을 교회에서 나눠 먹으며 아침이 될 때까지 놀다가 정작 성탄 당일 예배 중에는 열심히 졸았던 기억이 있는 저와는 대조적으로 참으로 창의적이고 의미있었는 성탄의 기억인 것 같습니다 ^^
내가 세종중학교를 다녀서 친구들 따라 중곡동에 있는 교회에 제법 갔었는데,
혹 그 때 환승 선배를 만났을 수 도 있었을 것 같은데요….
그 때 만났으면 엿 실컷 얻어 먹었을 텐데…. 아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