총신 학생운동의 뿌리를 찾아서 – 이미화, 원기준
총신 학생운동의 뿌리를 찾아서
•2022년 8월 8일 오후 2시-5시
•따뜻한 한반도 사랑의 연탄나눔운동 사무실
•이미화(종교음악과78),원기준(신학과80)
인터뷰 및 정리 : 정성우(신학과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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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0-90년대는 ‘학생운동의 시대’라 할 만큼 학생운동이 활발했던 시기다.
당시 학생들은 군사독재 정권의 폭압에 맞서 민주주의를 온 몸으로 지켜 냈다. 급속히 성장하는 자본주의의 모순과 폐악으로 고통받는 민중들과의 연대투쟁은 물론이고 스스로 민중이 되려는 선택마저 주저 하지 않았다. 나아가 분단과 외세의 지배로 왜곡된 현대사를 바로 잡기 위해 ‘양키 고 홈’과 ‘통일’을 목 놓아 외쳤다. 그렇게 80-90년대 학생운동은 한국사회의 민주주의와 민중의 억압과 민족적 모순 해결을 위해 혼신을 다해 투쟁 해 왔다.
한국 기독교에서 가장 보수적인 교단의 신학대학인 우리 총신도 도도한 역사의 흐름에 어엿한 주체로 함께 하였다.
『총신 학생운동의 뿌리를 찾아서』는 80-90년대 한 가운데를 관통 해 온 총신의 학생운동이 어디서 부터 시작되었는지, 어떤 과정을 거쳐 어디로 흘러 갔는지 돌이켜 보는 인터뷰이다. 이 인터뷰는 앞으로 70년대 말 부터 90년 중반까지 총신 학생운동과 동고동락했던 동문들을 찾아 그 날의 감회와 감동을 듣고 전달해 드리는 장이 될 것이다.
그 첫번째 인터뷰로 총신 학생운동의 태동기에 없어서는 안될 가장 중요한 두 분의 인터뷰를 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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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더운 날씨에 비까지 더해져 어깨에 맨 카메라 가방이 더욱 무겁게 느껴 지는 오후 였다. 그렇지만 총신 학생운동의 시조새격인 두 분 선배님을 인터뷰 한다는 생각에 발걸음은 생각보다 가볍게 인터뷰 장소로 향했다.
원기준 선배님이 일하고 계신 ‘따뜻한 한반도 사랑의 연탄나눔운동’ 사무실에 도착, 장비를 셋팅하고 두 분 선배님과 마주 앉았다. 순간 긴장감이 엄습해 왔다. 몇 번이고 인터뷰 상황을 머리속에 그렸다 지우기를 반복해 봤지만 막상 카메라와 마이크를 사이에 두고 두 분을 마주하니 선뜻 말문이 열리지 않았다. 마음을 가다듬고 심호흡을 크게 한 후 인터뷰를 시작했다.
인터뷰 1/5 – 입학당시 학내 및 시국 분위기는?
– 총회장 점거농성, 이사진 감금을 불사했던 교단개혁운동
70년대 말 80년 초, 총신은 79년 부터 진행되던 『교단개혁운동』이 한참이었다.
예장합동의 보수적이고 비민주적인 교단운영에 교단 내 몇몇 진보적인 인사들과 이에 동조하는 신학생들이 한마음으로 교단개혁을 외치고 있었다. 이런 움직임은 더욱 열망이 커져 급기야 79년 10월 25일에는 교단개혁을 외치며 학생들이 총회장을 점거하기도 했고, 80년 4월에는 총신대에서 개최된 이사회에 참석한 이사들을 도서관에 감금하는 등 매우 격렬한 교단개혁 투쟁이 전개 되었다고 한다.
인터뷰 2/5 – 학내 교단개혁과 사회참여
– 감리교 출신에 의해 주도된 교단개혁운동
주목할 점은 당시 학내 교단개혁을 주도 했던 선배 대부분이 ‘시사영어반’이란 서클에 속해 있었는데 이 분들이 감리교 출신의 교회나, 감신대에서 총신대로 이전 해 왔다는 것이다. 이 분들이 타 교단 출신임에도 굳이 총신으로 오게된 계기나 동기에 대해선 정확히 알 수 없다. 그러나 이 분들 눈에 합동측 교단의 행태나 총신의 분위기가 매우 보수적이고 비민주적인 모습으로 비춰 졌을 것은 분명하다. 아마 이 점이 교단개혁에 적극적이게 된 원인이지 않을까 추측해 본다. 이에 대해선 추후 당사자에게 직접 들어보는 시간을 마련해야 할 듯 하다.
– 현대판 남녀칠세 부동석 / 남녀간 미팅은 징계 사유
당시 총신이 얼마나 보수적 분위기인지 잘 보여주는 몇 가지 에피소드가 있는데, 이미화 선배님의 전언에 따르면 ‘남학생 여학생 1m 접근금지’라는 현대판 남녀칠세 부동석이 교칙까진 아니더라도 넘어서는 안되는 규범처럼 존재했다고 한다.
심지어 종교음악과 여학생의 경우 타 학교 남학생들과 미팅을 했다는 이유로 학교에 공고가 붙고 징계까지 받았다고 한다.
– 졸업정원제 도입과 교육학과 증설에 따른 분위기 변화
이런 학내 분위기에 변화가 오기 시작한 시점은 81년 발표된 ‘졸업정원제‘ 도입부터 였다. ‘졸업정원제‘란 대학 입학시 졸업정원의 30%를 더 뽑고 대신 졸업 때 30%를 탈락시키는 제도이다. 이는 당시 전두환 군사독재 정권이 학생들간의 경쟁을 유도하여 학생운동을 약화 시키려는 의도에서 도입한 제도 였는데, 아이러니하게 학생운동의 양적 성장에 기여하는 결과를 낳게 되었다.
총신도 신학과, 기독교 교육학과, 종교음악과 3개의 학과가 신학, 종교교육, 영어교육, 역사교육, 유아교육, 종교음악 등 6개 학과로 증설되고 입학인원도 졸업인원에 비해 30%가 늘어남으로 인해 학내 분위기도 신학과 중심에서 교육학과의 비중이 높아지는 쪽으로 변해 갔다. 여기에 84년 학원자율화 조치가 실행 되면서 학내에 상주하던 경찰이 철수하고 총학생회가 부활하는 등 억압적 학내 분위기가 많이 바뀌게 되었다.
– 80년 서울의 봄 당시 총신의 분위기는 어떠했는가?
교단개혁운동이 계엄령과 내적 동력 부족으로 좌절을 겪고 있는 사이 시국은 전두환 12.12 쿠테타와 서울의 봄 등으로 일촉즉발의 상황으로 치닫고 있었다. 이런 사회적 분위기로 부터 총신도 자유로울 수 없었다. 총신 역사상 최초의 시국집회가 80년 5월에 ‘비아 돌로로사’라는 서클의 주도로 열렸다. 여기에 원기준 선배도(당시 1학년) 참여하였다. 비록 10명정도가 참석한 시국집회였지만 총신의 환경에서 볼 때 매우 획기적인 사건이었다.
그리고 80년 5월 14일에는 총학생회가 주도하는 시국보고대회가 열리고 약 700명의 학생들이 가두로 진출하여 경찰과 대치하는 상황까지 이르렀다.
인터뷰 3/5 – 80년 서울의 봄과 총신대
– 교단개혁운동에서 사회개혁운동으로의 급격한 전환
80년 5월 서울의 봄 시기 남한에서 가장 보수적이고 권력 순종적인 교단 소속 신학대학인 총신대에서도 전두환 군부독재 타도가 한 목소리로 외쳐졌다.
원기준 선배의 메모에 따르면 8월14일 집회에 참석한 인원이 700여명 정도라고 하는데 이는 당시 총신대 전교생에 가까운 인원이었다.
주목할 점은 80년 5월에 이르자 학내 분위기가 교단개혁운동에서 사회개혁운동으로 급격하게 변화했다는 점이다.
이렇게 된데에는 사회 전체적인 분위기의 영향이 가장 컸겠지만 한편으로는 79년 10월25일 총회장 점거 농성이 바로 다음날 계엄령 선포로 좌절된 경험을 통해 교단개혁운동 역시 사회전반의 민주화 없이는 불가능하다는 실천적 경험이 가져다 준 인식의 심화도 무시할 수 없었을 것이다.
– 80년 5월 서울역 투쟁에 적극 동참하다.
80년 5월 15일 서울지역 학생들은 전두환 군사독재 정권 타도를 위해 서울역에 총집결 하기로 하였다. 우리 총신대도 ‘신학대학생 연합’의 깃발 아래 새문안 교회에 집결 했는데 이때 약 2,000여명의 신학생들이 집결 하였다. 이들은 광화문 사거리를 거쳐 서울역까지 행진하여 서울역 총력 투쟁에 동참하였다. 이때 총신대를 포함한 신학대학생 연합이 시위대 맨 앞에 서서 가열차게 투쟁 하였다고 한다.
서울역 광장에 운집한 수십만의 군중이 광화문쪽으로 행진을 시작하자 경찰들의 진압이 시작되었고 이에 총신대는 신대연과 함께 서소문쪽 고가도로에서 2시간여동안 경찰과 투석전을 전개하였다.
원기준 선배는 이 당시 군중들의 함성과 투쟁 모습이 40년이 지난 지금도 잊을수가 없다고 하셨다.
– 서울역 회군과 광주학살
이 날의 투쟁은 소위 ‘서울역 회군’이라 지칭되는 결정을 거쳐 자진 해산 하였다. 그러나 이 결정은 결과적으로 신군부 세력에 사태 수습의 시간을 벌어주는 결정이 되었다.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신군부는 계엄령을 전국으로 확대 발포 하였고, 이에 강력히 반발한 광주를 총칼로 학살하며 자신의 권력을 공고히 할 수 있었다.
– 보수의 저력은 ‘믿는대로 실천한다.’
이미화 선배는 당시 총신대 학생들의 적극적인 참여를 교단개혁운동의 좌절에 대한 실망감과 분노가 시국상황과 맞물리면서 교단개혁과 사회개혁이 하나가 되는 독특한 경험이라고 분석하였다.
또 한편으로는 총신대나 신학대학생들의 적극성을 ‘믿는데로 실천한다.’는 순교자적인 성향이 나름 작용한 결과로 보았다. 보수 교단의 특성상 일상적으로 사회적 실천에 동참하는 것은 힘들지만 일단 그것이 하나님의 뜻과 일치한다고 판단이 들면 그 누구보다도 적극적으로 실천에 앞장 선다는 것이다. 당시 거의 전교생이 시국 집회에 나서고 서울역 투쟁에 적극적으로 동참 했던 것도 이런 보수적 특성에 기인한 바가 크다는 분석이다.
인터뷰 4/5 – 운명적인 만남
– 싹트는 변화의 조짐 그리고 좌절
인터뷰를 진행하면서 총신에 학생운동이 시작되기 전 부터 이를 위한 토양이 서서히 만들어지고 있었다는 것을 느꼈다.
변화의 중심 축은 교단개혁운동이었다. 보수적인 교리와 그에 따른 사회개혁에 대한 무관심이라는 총신의 색깔은 교단개혁운동 속에서 서서히 허물어져 가고 있었다. 그리고 여기에 80년 서울의 봄이 더해져 변화의 조짐은 교단차원을 넘어 사회개혁에 까지 미치기 시작했다.
그러나 80년 광주학살을 기점으로 급속히 얼어 붙은 정국은 일체의 민주적 요구를 묵살 하였고 이는 사회 민주화 뿐만 아니라 학내 민주주의 요구 조차도 예외는 아니었다.
79년 부터 진행된 총신대 교단개혁운동 역시 당시 상황과 맞물려 좌절을 맛보게 된다. 80년 5월 이후 학내 교단개혁운동도 활로를 찾지 못하고 흐지부지 되자 이와 함께 교단개혁운동을 주도 했던 선배들도 더 이상 총신에서 전망을 찾지 못하고 손을 놓게 되었다고 한다.
– 그래도 포기할 수 없었다. 새로운 모색의 시작
그러나 한번 변화의 바람을 접한 원기준 선배는 변화에 대한 갈망을 억누를 수가 없었다. 그 때부터 새로운 전망을 찾기 위해 ‘미친듯이’ 돌아 다녔다고 한다. 총신내에서는 이 ‘갈증’을 해소 할 수 없다는 생각에 기회만 되면 외부의 강연이나 집회에 참석해 새로운 신학사상과 이론을 접하고 공부하였다. 그렇게 80년 하반기 부터 81년까지 누구의 도움도 없이 혼자 탐색의 시간을 가졌다. 그러면서도 채워지지 않는 무언가가 계속 남아 있었다.
한편 이미화 선배는 성대결절로 80년 이후에 휴학을 한 상태였다. 그러나 휴학 중에도 KSCF(한국기독학생총연맹)에서 학습을 계속 진행하고 ‘신학대 학생연합‘에 결합하여 활동하고 있었다. 아마도 이 시기에 총신내에서의 조직적 학생운동에 대한 이론적 실천적 준비가 진행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 만남 : 총신대 학생운동이 시작되다.
두 분의 만남이 원기준 선배에게 어떤 의미였는지는 본인의 입을 통해 들어보면 잘 알 수 있다.
“ 총신대 안에서 여자 선배가 말이 통해, 근데 쫙 깔고 있는 게 내가 1,2학년 때 미친듯이 돌아 다니면서 배울려고 하고 알려고 했던거에 대해서 그건 이런거고 저건 저런거고 이랬을때 내가 뭔가 혈이 뚫리는 느낌 이런거지.”
그리고 더 중요한 말이 다음에 나온다.
“ 더군다나 다른 선배들은 하지마라. 다 쓸데 없는 짓이다. 니 살길이나 찾아가라. 했는데 미화 선배는 교단개혁과 사회개혁이 따로 있는게 아니고 다 맞물려 있는거다. 이런거를 종합적으로 내게 얘기한거지. 그래서 미화 누나를 자주 만나게 되었고 내 얘기를 하게 된거지. 그러면서 그러면 총신대 안에서 후배들에게 무엇을 해야 되냐. 본격적으로 얘기하게 된거지.”
미화 선배와 기준 선배는 82년 미화 선배가 복학하기 전까지 전혀 알지 못했다고 한다. 미화 선배는 학교 밖에서 교회 대학부나 kscf에서 학습과 활동을 꾸준히 하고 있었고 기준선배는 학내 경험을 통해 교단개혁과 사회변혁에 관심을 갖게 되었는데 이 둘이 하나로 합쳐지면서 더 이상 개인이 아닌 조직운동이 총신에서 가능해 진 것이다.
이처럼 보수의 철옹성 같던 총신대에도 서서히 변화의 조짐이 보이기 시작했다. 그렇지만 아직까지는 가능성에 불과했다. 가능성이 현실이 되기 위해선 보다 조직적이고 목적의식적인 활동이 절실했다.
인터뷰 5/5 – 총신 학생운동의 출발
– 무수히 많은 시도와 실패, 그래도 포기할 수 없다.
82년 만나 총신대에서 학생운동을 조직적으로 해보자고 의기투합한 두 분은 조직화를 위해 많은 시도와 실패를 경험하게 된다. 변화의 바람이 있었다고는 하지만 여전히 공고한 보수적 종교관에 물들어 있는 후배들을 사회변혁의 관점으로 묶어 세우는 일은 쉽지 않았다.
82년도 내내 무수히 많은 후배들을 만났고 그들에게 새로운 관점이 뿌리 내리도록 많은 공을 들였지만 모든 시도가 실패로 끝나 버렸다. 그래도 두 분은 결코 포기하지 않고 실패를 좋은 교훈으로 삼아 끊임 없이 조직화 시도를 했다고 한다.
– 드디어 조직화의 싹이 트기 시작하다.
실패와 좌절의 반복 속에서도 결코 포기하지 않고 조직화를 위한 노력은 계속 진행 되었다. 마침내 83년도에 들어서면서 조직화 사업의 성과가 서서히 나타나기 시작했다. 82학번에서 한명, 83학번에 여러 명의 모임이 만들어지고 유지되면서 서서히 재생산구조를 갖춰 나가기 시작했다.
– 일반 학생운동과 다른 총신 학생운동의 특수성
일반 학생운동의 조직화와 달리 총신대는 일반대의 고민에 신학적 고민의 해결이라는 특수한 해결과제가 더해져서 조직화 과정의 어려움이 배가 되었다. 제도권 교육의 한계를 극복하기 앞서 보수적 신학 내지는 신앙관을 뛰어 넘게 하는 것이 굉장히 어렵고도 중요한 문제였기에, 조직화 작업의 어려움이 일반 대학에 비해 더 컸었다.
그래서 두 분이 학내에 남아 있었던 85년 말까지는 학습 커리큘럼에 진보적 신학이론을 배치하여 이런 고민을 해결하려고 노력하였다. 실제로 서울대등 외부 학교에서 총신대 학생운동에 직접적인 영향력을 갖기 위해 많은 시도를 하였지만 두 분은 총신만의 특수한 문화와 정서에 기반한 독자성을 유지하기 위해 부단히 노력 했었다고 한다.
하지만 86년 말 이후 전체 학생운동의 대중 영향력이 성장하고 또 총신대 학생운동 세력내에 비 신학과 비중이 높아지면서 신학적 고민이나 이론화 작업의 중요성이 감소하게 되자 차츰 총신대 특수성에 기반한 작업들이 등한시 되었다. 이 점에 대해선 두 분 모두 안타까운 심정을 나타내었다.
– 학생운동의 정리와 사회이전
이미화 선배는 84년 말을 끝으로 총신대 학생운동을 정리 하고 도시빈민을 대상으로 한 작은 교회 운동에 투신하였다. 학내 관리는 자연스레 원기준 선배의 몫이 되었다.
원기준 선배도 84년에 졸업해야 했지만 아직 완전히 자리잡지 못한 학내 운동을 위해 원치 않는 대학원 진학을 선택하고 85년 말까지 학내 운동을 위해 헌신했다. 대학원 생활은 원기준 선배의 말을 빌자면 미처버리기 일보직전 까지 갈 정도로 힘들었다고 한다. 그래도 학내 조직이 최소한의 재생산 구조를 갖추기 전까지는 최선을 다해야 한다는 일념으로 버텼다고 한다.
두 분의 희생과 노력으로 85년에 들어서자 총신 학생운동 조직은 82학번 부터 83, 84, 85 학번까지 비로소 학년별 체계가 갖춰졌다. 아직 완전히 안정된 상태는 아니지만 최소한의 재생산 구조가 완성 되었으며 학년이 내려 갈 수록 그 수가 증가하는 피라미드 구조가 마련된 것이다.
선배로서 모범적인 사회이전을 보여 줘야 한다는 학생운동 마지막 책무를 다하기 위해 두 분이 총신 학생운동을 정리 해야 할 시기가 다가왔다.
이미화 선배는 이미 84년에 빈민운동으로 이전 하여 작은 교회 운동을 전개하고 있었고, 학내 안정화를 위해 남았던 원기준 선배도 노동운동 투신을 고민하고 알아보다 여러 사정으로 탄광노동자 투쟁에 결합하기 위해 태백으로 내려 갔다. 산파 역할을 했던 두 분이 떠난 뒤 총신 학생운동은 새로운 도전에 직면하였다. 전체 학생운동이 이론투쟁의 단계에 빠져 든 것이다.
이제 막 자리 잡기 시작한 총신 학생운동이 전국 학생운동을 강타한 이론투쟁의 국면을 어떻게 뚫고 나갔는지 사뭇 궁금하지만 이 날의 인터뷰는 여기서 마무리 되었다. 더 많은 질문과 듣고 싶은 얘기가 산더미 처럼 남았지만 시간상 어쩔 수 없어 2차 인터뷰를 약속하고 끝마쳤다.
2차 인터뷰도 많은 기대 부탁드립니다. 빠른 시일 내에 2차 인터뷰를 진행하고 정리해서 올리도록 하겠습니다.
이미화선배님, 원기준선배님 ~ 지면과 인터뷰만으로도 너무 반갑습니다!
총신 학생운동이 뿌리 내릴 수 있도록 열정과 고민으로 그 시절을 헌신하고 희생하였기에 지금까지도 참된 인간의 삶에 대해 사유하고 그 삶의 무리에 실천으로 동참하는 한 사람이 되고자 애쓰고 있습니다.
감사하고 다음에 이어질 인터뷰도 너무 기대가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