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Ⅱ.더 높은 곳을 향하여

과거에서 온 미래사회 – 유토피아

서평 – 정성우 (신학 85)

'리영희와 그의 유토피아’ 

지난 5월 인터넷에서 기사를 검색하던 중 ‘리영희와 그의 유토피아’라는 제목이 눈에 들어 왔다.  대학 초년생이던 1985년, 내적 혼란이 극심했던 그 시절,  리영희의 전환시대의 논리, 우상과 이성과 같은 책은 한 줄기 빛으로 내 기억 속에 각인 되어 있다. 그런 리영희에게 500여년 전의 오래된 고전이 어떤 의미가 있었기에 하나의 문장속에 연결 지어진 것일까? 하는 궁금증이 강하게 밀려와 자연스레 기사를 클릭 했다.

 

기사를 읽으며 리영희에게 유토피아는 단순한 지적 호기심의 대상을 넘어 박정희 군사독재 치하에서 이상적인 대안 사회는 무엇인가?라는 근원적 질문에 영감을 불어 넣는 역할을 하였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리영희에게 번뜩였던 것들이 40여년이 지난 지금도 여전히 유효하다는 것은 신선한 충격이었다. (기사원문 : https://www.pressian.com/pages/articles/2023053014163683190

 

기억 속에 희미하게 제목만 덩그러니 있던 유토피아는 그렇게 다시 내 손에 들어왔다.

리영희 선생

 

“나의 수염은 반역죄를 짓지 않았다!!”

 

1478년 영국 런던에서 법관 존 모어의 차남으로 태어난 토머스 모어는 옥스퍼드 대학에서 고대 그리스어와 라틴어, 신학 등을, 링컨 법학원에서 법률을 배웠다. 그때 에라스무스와 친교- 에라스무스의 대표작 우신예찬은 모어의 집에서 집필되었다.- 를 맺어 많은 영향을 받았으며, 졸업 후 변호사를 개업하였다. 당시 영국의 인문주의자들과 친분이 두터웠던 그는 평생 스콜라주의적 인문주의자로서 덕망이 높았다.

 

정치•행정 분야에서도 모어는 탁월한 능력을 보인다. 1504년 하원 의원에 선출되고 1510년 런던 부시장•하원 의장 등을 역임 하였으며, 1510년 시티 오브 런던의 주장관 대리 가운데 한 사람이라는 중요한 책무를 지닌 자리에 있었고 1523년에는 잉글랜드 하원 의장이 되었다. 

스콜라 철학과 인문주의, 그리고 다양한 정치• 행정 경험은 그의 저서 유토피아가 마치 실재하는 국가를 그리고 있다는 착각에 빠질 만큼 구체적이고 사실적인 묘사가 가능케 하였다. 유토피아 출간 당시 이를 사실로 믿는 사람들이 다수 있었으며 심지어 성직자중 한명은 기독교 전파를 위해 자신을 ‘유토피아’로 파견시켜 달라고 대주교에게 부탁하기도 했다는 유명한 일화가 있을 정도이다.

 

평생 독실한 카톨릭 신자였던 토머스 모어는 교황의 권위를 부정하는 헨리8세의 왕위지상령에 반대하다 1535년 반역죄로 참수형에 처하게 된다.  처형 날짜인 7월 6일 몰려든 군중을 향해 “나는 왕의 좋은 신하이기 전에 하느님의 착한 종으로서 죽는다.”라고 선언했다. 

모어의 참수형에 관한 에피소드가 있는데, 모어는 사형이 집행되기 직전에 사형 집행인에게 자기 수염은 반역죄를 짓지 않았기 때문에 도끼를 받을 이유가 없다고 하였다.  모어가 처형대의 받침 위에 놓인 자기 수염을 치우자 도끼가 그의 목을 내리쳤다. 

토머스 모어

 

몰락하는 봉건제, 아직 오지 않은 자본주의

 

유토피아가 쓰여진 16세기 초 영국은 프랑스와의 백년전쟁, 귀족 가문 간의 왕위 쟁탈전인 장미전쟁등을 치르면서 왕권은 강화 되었고 봉건 귀족의 세력은 크게 약화 되었다. 여기에 더해 1374년 이탈리아에서 시작되어 유럽 전역으로 확산된 흑사병은 농업인구를 크게 감소시켰고,  노동력이 부족해지자 지주 중 일부는 농민에게 토지를 임대하여 주기 시작하였다. 지대도 노역봉사나 현물에서 화폐로 바뀌기 시작했다. 그 결과 토지 매매가 가능해 졌고, 토지를 소유한 부농과 임금을 받아 생활하는 영세농이나 다수의 농업 노동자 계층으로 나뉘기 시작했다.

 

농촌의 파괴는 1492년 콜럼버스의 신대륙 발견 이후 급증한 양모 수요로 촉발된 인클로저 운동에서 극에 달한다. 

 

양(羊)입니다. 예전에는 지극히 온순 했고 먹는 양도 매우 미소했었지요. 그러던 것이 이제는 몹시 게걸스럽고 사나워져서 사람도 먹어 치운다고 들었습니다. 양들은 논밭과 가옥을 황폐시키고 마을을 강탈합니다. 귀족들과 영주들은, 아 그리고 다른 일에서는 고결한 분들이신 일부 수도원장들까지도, 이 나라 어느 곳이든지 가장 부드럽고 값비싼 양모가 산출되는 지역이라면 자기 조상들이 그 땅에서 받았던 지대(地代)에 만족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이들은 사회에 득이 되는 일은 하지 않으면서 나태하고 사치스럽게 사는 것만으로는 더 이상 만족할 수가 없어서 이제는 적극적인 악행을 시작합니다. 경작할 수 있는 땅을 모두 없애 버리고, 목초지를 조성하기 위해 울타리를 둘러 놓으며, 집을 부수고, 마을을 없애 버리고, 양 우리로 사용할 건물과 교회만 남겨 놓습니다.   (유토피아 1권 중에서)

 

귀족은 물론이고 심지어 성직자 까지 장원의 공유지에 살던 농민들을 내쫓고 울타리를 쳐 양(羊)을 길르기 시작하자 하루 아침에 생활의 터전을 잃고 쫓겨난 농민들은 거지가 되어 떠돌거나 임금노동자로 전락하였다.

귀족들의 탐욕으로 인해 유일한 생존수단인 농지로부터 강제 분리된 농민들이 넘쳐 났지만 아직 자리 잡지 못한 자본주의적 생산관계하에서 이들 중 일부만이 경제활동을 할 수 있었고 대다수의 농민들은 값싼 임금 농업노동자로 근근이 생활을 유지하거나 걸인이 되어 거리를 배회 하면서 비참한 생활을 이어 가야 했다.  그리고 농촌에서 수용되지 못한 많은 수의 농민들은 도시로 대거 이동해 거대한 도시빈민층을 형성하여 산업혁명에 필요한 값싼 노동력을 제공했다. 

 

‘서서히 무너져 가는 봉건제와 아직 도래하지 않은 새로운 사회’ , 토머스 모어의 유토피아는 과도기적 영국사회에서 대안을 찾기 위한 몸부림의 일부 였다.

양이 사람을 먹고 있다. - 인클로저

기본 소득, 6시간 노동제의 원조 – 유토피아 

 

유토피아는 토머스 모어가 1516년에 출판한 소설이자 정치 철학 저작이다.

영국 왕 헨리8세와 카를로스 왕자(이후 신성로마제국의 카를5세)와의 정혼과 파혼으로 촉발된 무역전쟁을 해결하기 위해 영국의 플랑드르 사절단의 일원으로 파견된 토마스 모어는 네덜란드에 체류하는 6개월 동안 유토피아의 제2권을  쓰고 제1권은 잉글랜드로 돌아와서 썼다. 

 

제1권은 토머스 모어가 유토피아 제2권을 쓰게된 계기를 설명하는 글이다. 우연한 기회에 소개받은 포루투칼 선원 라파엘 휘트로다이우스씨에게서 듣게 된 신기한 이상 국가 얘기를 정리한 것이 유토피아 제2권임을 밝히고 있다.

 

‘유토피아’를 구체적으로 묘사하는 2권에서는 상당히 방대한 부분을 언급하고 있다. 그 주제만 보더라도 유토피아의 지리, 도시의 특징, 관리(공직자 선출과 임기 등), 직업,  사회 구조 및 재화의 분배, 여행과 교역, 금과 은(화폐 제도), 도덕 철학, 학문의 즐거움, 노예, 불치병 환자에 대한 배려(존엄사 인정), 결혼 풍습, 처벌• 법적 절차 및 관습, 외교관계, 전쟁, 종교 등 16개 분야로 사회 전반에 걸쳐 언급하고 있고 내용적인 면에서 500여년 전 당시 로서는 매우 파격적인 내용이 다수 포함 되어 있다.  

 

그 중 현재에 논의된 것이라고 말해도 될 만한 것중 하나가 기본 소득에 관한 것이다.

 

절박한 상황에 몰려서 도둑질을 하다가 목숨을 잃게 하는 대신에 모든 사람들이 생계를 유지할 수 있도록 일거리를 마련해 주는 것이 훨씬 더 바람직한 일임에도 불구하고, 도둑질에만 가혹하고 끔찍한 처벌을 시행하고 있습니다. – 유토피아 1권 라파엘 휘트로다이우스 발언 중

 

16세기 초 영국은 농촌에서 분리된 빈민들과 걸인 들로 넘쳐 났고 생계형 절도가 만연했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 영국 사회가 선택한 방법은 강제력에 의한 폭력적 방식이었다. 부랑자를 잡아 벌하고 강제 노역을 시키거나,  단순 절도범도 참수형에 처하는 등 처벌 강화를 통해 공포심을 유발시켜 통제 하려는 방식을 채택하였다. 

 

반면 토머스 모어는 이들에게 도둑질에 내몰리지 않을 만큼, 즉 생계를 유지 할 만큼의 수입이 가능한 일자리를 국가가 제공함으로써 이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 할 수 있다고 제시한다.

당시 영국에 만연한 빈곤이 개인의 나태나 도덕적 헤이 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인클로저운동과 같은 사회구조적 문제가 근본적 원인이며 따라서 이에 대한 해결은 공동체 전체의 책임이라고 본 것이다.

 

토머스 모어의 이러한 생각은 이 후 푸리에, 생시몽과 같은 공상적 사회주의자를 거쳐  맑스-레닌주의자, 유럽 좌파 등에 기본 소득이라는 개념으로 계승되어 현재 까지 이어지고 있다. 코로나 사태를 거치면서 우리 사회에 본격적으로 제기된 기본 소득의 원조가 바로 토머스 모어의 유토피아인 것이다.

 

더욱 놀라운 것 중 하나는 ‘6시간 노동제’에 대한 언급이다. 

 

유토피아 사람들은 하루 스물네 시간 중 여섯 시간만 일을 합니다. 정오까지 세 시간 일하고 점심 식사를 합니다. 점심 후에는 두어 시간 휴식을 취한 다음 다시 세시간 동안 일을 하러 갑니다. 그리고 저녁 식사를 하고 8시에 잠자리에 들어서 여덟 시간 동안 잡니다. – 유토피아 2권 ‘직업’ 중에서

 

 자본주의 출범이후 ‘노동시간 단축’은  인간다운 삶을 요구하는 노동자와 장시간 노동을 통해 이윤을 극대화 하려는 자본간의 유혈투쟁의 역사이다. 노동시간 단축의 길은 하루 18시간에 달하는 살인적인 노동을 거쳐 현재의 8시간 노동제까지 오는 동안 무수히 많은 노동자들의 고통과 투쟁으로 점철되어 있다. 그리고 현재 몇몇 나라에서는 6시간 노동제 도입을 추진하고 있지만 아직 6시간 노동제가 보편화 되고 있지는 못한 실정이다. 그런데도 모어는 500년 전에 유토피아에서 기본적인 제도로서 6시간 노동제를 제시하고 있다. 그리고 이것이 가능한 근거를 매우 구체적으로 다음과 같이 들고 있다.

 

여기에서 우리가 되돌아보고 한 가지를 좀 더 주의 깊게 고려하지 않는다면 이 모든 것에서 그릇된 인상을 받을 수가 있습니다. 일하는 데 여섯 시간만 할애하니까 생필품의 공급이 부족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할 수 있지요. 실은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이들의 노동 시간은 생필품의 생산 뿐 아니라 생활의 편리를 도모하는 물품까지 생산 하고도 남을 정도로 충분합니다.  다른 나라들에서(유토피아 이외의 나라들) 인구의 상당 부분이 아무런 일도 하지 않고 살아간다는 사실을 고려하면 이를 쉽게 이해할 수 있을 겁니다. 우선 인구의 절반을 차지하는 여자들의 대부분이 직업을 가지고 있지 않거나, 여자가 일을 하는 경우라면 남편 되는 사람들은 침대에 누워서 코나 골고 있지요. 그리고 신부들과 소위 종교인이라는 게으른 대집단이 있습니다. 여기에다가 모든 부자들을, 특히 신사나 귀족이라는 이름으로 불리는 지주들을 첨가해 보십시오. 이들에게 소속되어 거들먹거리면서 주먹이나 휘두르는 무리인 시종들도 포함해 보십시오. 마지막으로, 나태에 대한 핑계로 병을 가장하고 살아가는 건장하고 원기 왕성한 걸인들의 수효도 계산에 포함하십시오. 그러면 우리의 필요를 충족시키는 물품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적은 수의 사람들에 의하여 생산된다는 것을 쉽게 알 수 있을 것입니다.  – 유토피아 2권 ‘직업’ 중에서

 

토머스 모어가 생각한 6시간 노동제의 실현 조건은 본인이 직접 노동하지 않으며 타인의 노동을 통해 먹고 살아가는 제 집단을 사회적 노동에 투입하는 것이다. 당시에는 지주, 성직자, 신흥 부르조아지 등등이었으며 여기에 사회적 소외 대상인 여성이 포함된다. 즉 사회 구성원의 대부분이 사회적 노동에 참여하게 하는 것. 그래서 소수의 유산계급만이 아니라 공동체 성원 전체의 인간적인 노동과 삶이 실현 되는 사회를 꿈꾸었던 것이다. 그러면 이런 사회가 어떻게 가능할까? 유토피아를 좀 더 읽어 보자.

8시간 노동제

자본주의가 오기도 전에 자본주의를 비판한 ‘유토피아’

 

16세기 유럽은 봉건제의 몰락이 빠르게 진행되는 한편 자본주의의 맹아가 싹트고 있기는 했지만 아직 뿌리를 확고히 내리지는 못하였고 그에 따른 사회적 혼란이 극심 했던 시기이다. 이런 상황에서 쓰여진 유토피아는 토머스 모어의 배경과 경력에 비추어 볼 때, 단순한 문학작품이 아니라 당시 영국 사회의 문제점과 이에 대한 대안을 제시하는 정치•철학서의 성격을 강하게 나타내고 있다.

 

그럼 토머스 모어가 바라 본 사회 문제의 근원은 무엇이었을까?

 

그러나 모어 선생님, 내가 생각하고 있는 바를 말씀드리자면, 사유 재산이 존재하는 한, 그리고 현금이 모든 것의 척도인 한, 나라를 공평하고 행복하게 통치한다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그러므로 사유 재산이 완전히 사라지지 않는 한 공정하고 올바른 재화의 분배는 있을 수 없으며 국민이 행복하게 살도록 통치하는 국가도 있을 수 없다고 나는 확신합니다.

 

토머스 모어는 ‘사유 재산’제도를 당시 발생하고 있는 모든 문제의 출발점으로 생각했다. 공정하고 올바른 재화의 분배가 공동체를 건강하게 유지하는 필수불가결한 조건으로 바라보고 이를 저해하는 것이 ‘사유 재산’이라는 것이다.

또한 앞으로 도래할 자본주의 사회의 형태와 문제점에 대해서도 정확히 예측한다.자본주의는 이전의 사회와 마찬가지로 ‘사유 재산’제도에 기초한 사회임과 동시에 이전 사회와 자본주의가 구별 되는 지점은 ‘현금이 모든 것의 척도’가 되는 사회, 즉 ‘화폐경제가 지배 하는 사회’이다. 

아직 ‘자본주의’라는 개념조차 형성되지 않았던 시기에 모어는 다가 오고 있는 사회가 ‘화폐’가 전면화 되는 자본주의 사회라는 것을 예측한 것이다. 문제의 출발점인 ‘사유 재산 제도’와 이를 더욱 강화하고 전면화 시키는 ‘화폐’의 지배가 가장 큰 원인이라고 본 모어의 예지력이 놀랍다. 그리고 그가 예측한 문제의 근원은 아직도 계속 되고 있으니 유토피아는 현재 진행형인 것이다. 

 

사유 재산과 화폐가 존재하지 않는 유토피아는 계획 경제 사회이다. 

 

이들은 각 도시와 그 주변 지역에서 소비하는 곡물의 양을 정확하게 알고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들이 필요로 하는 것보다 훨씬 더 많은 양의 곡물과 가축을 산출하여 잉여물은 이웃 사람들과 공유합니다. 시골 사람들이 필요로 하는 물품으로서 시골에서는 생산이 가능하지 않은 것들은 도시 행정 관리에게 요청하며, 이에 대해서는 지불할 필요도 없고 교환할 필요도 없으므로 자신들이 원하는 것을 아무런 불편 없이 얻을 수 있습니다. – 유토피아 2권 유토피아 지리 중에서

 

그리고 사유 재산이 존재 하지 않는 계획경제 사회가 왜 ‘유토피아’인지 다음과 같이 제시한다.

 

다른 나라에서는 사람들이 공공의 복지에 대해서 지극히 자유로이 이야기 합니다만, 그러나 그들이 말하는 복지라는 것은 그들 개인의 복지일 뿐입니다. 개인적 사업이라는 것이 부재하는 유토피아에서는 모든 사람들이 공공사업에 심혈을 기울입니다. 그러나 유토피아에서나 다른 모든 나라들에서나 사람들이 하는 행동은 나름대로 모두 옳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들(유럽) 세상에서는 비록 국가가 번영한다고 할지라도 만약 개인이 자신을 위하여 따로 식량을 마련하지 못할 경우에는 얼마든지 굶어 죽을 수도 있다는 것을 모두들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하여 이 처절한 필요성은 사람들로 하여금 남을 위하기보다는, 즉 나라를 위하기보다는 자기들 자신을 보살피지 않을 수 없게 만듭니다. 그러나 모든 것이 공유되고 있는 유토피아에서는 공공 창고가 가득 차 있는 한 그 누구도 자기가 필요로 하는 것이 부족하게 될까 봐 걱정할 필요가 없습니다. 이들에게 있어서 분배는 전혀 문제가 안 됩니다. 유토피아에는 가난한 사람도 없고 거지도 없습니다. 비록 그 누구도 무엇을 소유하고 있지는 않지만 모든 사람이 부유합니다. – 유토피아 2권 

 

사실 유토피아의 사상의 한 축은 플라톤의 사상에서 많은 영향을 받고 있다. 도시의 규모를 제한하는 것이나 지도자를 선출하는 방식과 엘리트주의에 기반한 왕도정치 사상, 시민들의 공동체 생활 등을 보면 그 뿌리가 플라톤에서 출발한다는 사실을 쉽게 확인 할 수 있다.  사유 재산 부정과 재화의 공정한 분배 역시 플라톤의 국가와 매우 흡사한 모습을 보이고 있다.  이는 토마스 모어가 어려서 부터 라틴어와 고대 그리스 사상을 깊이 있게 공부한 것을 상기해 보면 당연한 것일 수도 있다.

그러나 유토피아가 과거로부터만 자양분을 공급 받은 것은 아니다. 당시 유럽사회의 ‘인문주의’가 또 다른 한축을 형성하고 있다.

유토피아 공화국

 

유토피아가 출간 되고 나서 토머스 모어가 여러 인문주의자들과 주고 받은 서신 중 하나인 페터 힐러스에게 보내는 편지 서두에는 ‘유토피아’의 정치제제를  공화국이라고 명확히 서술하고 있다.

절대왕정이 힘을 얻어 가고 있던 시기에 토머스 모어는 이상적 국가체계로 왕정이 아닌 공화국을 상정하고 있는 것이다. 밑으로 부터 시민에 의해 선출된 엘리트 집단이 모두의 이익과 권리를 보장하기 위해 공적 이익과 공동체의 안녕(安寧)을 중요시하며 신분적, 계급적 차이 즉 개인적 차이 보다는 공동체 구성원으로 국민이나 시민의 미덕을 고양시켜야 한다는 것이다. 

 

고대 그리스에서 부터 출발한 고전적 공화주의가 “미덕을 갖춘 시민이 공익을 위해 사익을 양보하는 것”이라는 표현에서 처럼 공익을 사익에 앞서 우선 고려했다면 유토피아의 공화주의는 개별 구성들 사이에 경제적 평등, 사회적 평등이 전제되어야 가능한 루소의 평등주의적 공화주의에 더 가깝다.

고대로 부터 공화제는 많은 논의가 있어 왔고 로마등 몇몇 국가에서 실제로 실행 되기도 하였다. 하지만 근대적 개념의 공화제는 사고실험에 머물러 있었을 뿐 역사적 실재로 등장하지는 못하다가 1776년 7월 4일 미국의 독립선언으로 비로소 그 현실성을 획득하게 된다.  유토피아가 쓰여지고 약 200년 뒤의 일이다.

 

이 밖에도 유토피아에서는 흥미로운 것들을 제안하고 있다. 불치병을 앓고 있는 환자에게는 존엄하게 죽음을 받아들일 수 있는 안락사 제도를 제시하고 종교의 자유를 주장하며 당시 유럽사회의 용병제도의 장점과 고대 스파르타의 병사 육성 방식을 혼합한 전쟁관을 피력 하기도 한다. 

아주 특이한 결혼 맞선 제도도 독자들이 확인해 보기를 바란다.  지금으로서는 받아 들이기 힘들지만 토머스 모어가 제시하는 근거를 읽어 보면 그럴 수도 있겠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또 다시 리영희 – 끝나지 않은 유토피아 읽기

 

해직과 복직 또 다시 강제 해직을 반복하던 리영희 선생이 유토피아를 처음 읽은 것은 1972년 1월 18일이다. 그 뒤로 몇 번을 반복해서 읽었는지는 모르지만 선생의 책 곳곳에는 밑줄과 자필 요약 글이 써 있다. 이후 기회 있을 때마다 추천도서 항목에 반드시 유토피아를 포함시킨 것을 보면 유토피아가 당시 선생에게 큰 감명을 준 것은 사실인 것 같다.

 

“자본주의에 매몰되어 경쟁으로 치닫는 현대는 멈춤이나 공생, 옆을 돌아보는 여유가 없다. 이런 때일수록 시대를 지혜롭게 넘어설 ‘유토피아적 상상력’과 ‘발상의 전환’이 필요하다. 삶을 길게 보고 스스로를 성숙시키면서 시대의 한계를 넘어서라!”(이명옥, ‘시대의 지성’ 리영희 선생님과 함께 한 독서토론, <오마이뉴스>, 2008년 10월 21일.) – 프레시안 기사에서 재인용

 

500년 전 토머스 모어가 쓴 유토피아는 사회에 대한 뛰어난 통찰과 날카로운 지성이 빛나는 수작이다.  비록 역사적 한계로 인해 현재의 관점에서 보면 얼토당토않은 점들이 있는 것도 사실이지만 그럼에도 시대를 뛰어넘어 현재까지 영향을 미치고 있는 이유는 우리 사회의 많은 문제의 출발점이 16세기나 500년이 지난 지금이나 크게 달라지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사회적 불평등을 전제로 한 부의 독점, 모든 것이 화폐로 환원되는 물질 만능주의 사회, 공공선이 파괴되어도 개인의 부만 축적할 수 있다면 그것이 그 사람의 능력으로 평가받는 신자유주의의 능력주의 도덕관 등등 이 모든 것들로 부터 고통 받고 있는 우리의 현실이 극복 되지 않는 한 유토피아 읽기는 계속 될 것이다. 토머스 모어가 자신의 발 밑에서 하늘로 날려고 시도 했듯이 우리도 우리가 딛고 있는 대지를 박차고 날기 위해 애쓸 것이기 때문이다. 

 

영원히 변하지 않을 것 같은 절망적인 현실에 맞서 당대 지식인이 취해야 할 태도에 대한 토머스 모어의 발언은 지금도 우리에게 큰 울림을 주고 있다.

 

풍향을 조절할 수 없다고 해서 폭풍 속에서 배를 저버리지는 마십시오.그리고 당신과는 다른 방향으로 생각이 굳어 있는 사람들이라는 것을 알면서 그런 사람들에게 당신의 낯선 아이디어를 오만하게 강요하지 마십시오. 정책에는 간접적으로 영향을 미칠 수 있도록 노력하고, 상황은 요령 있게 처리하도록 최선을 다하여야 하며, 좋게 만들 수 없는 것은 가능한 한 최소로 나쁘게 만들도록 힘써야 합니다. 모든 사람을 좋은 사람으로 만들지 않는 한 모든 제도를 좋은 제도로 만든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니까요. 그리고 모든 사람이 좋은 사람이 되는 날이 그리 빠른 시일 내에 오리라고는 기대하지 않습니다. – 유토피아 1권 중에서

리영희 선생의 책과 신문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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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영희 선생은 [유토피아]의 모델이 되는 사회가 역사적으로 실재 했을 가능성에 관심을 가졌던 것으로 보인다. 한 독서토론 자리에서 리영희는 유토피아가 마야 문명에 실재한 공동체 모형일 수 있다는 오래된 영문판 기사를 수첩에서 꺼내 보여 주었다고 하는데, 이는 1992년 6월 21일 <가디언 위클리> 뉴스 ‘Utopia finally put in its place?’ 라는 제목의 기사이다. 내용의 핵심은 유토피아가 모어가 만들어낸 허구의 세계가 아니라는 데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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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알면 도움이 되는 용어 정리 >

  1. 유토피아 (Utopia)

   유토피아(utopia)는 그리스어로 없다는 의미의 ou와 장소를 뜻하는 topos의 합성어(영어로는 no place)이다. 문자 그대로 지구 상에는 없는 곳이다.

 

  1. 라파엘 휘트로다이우스

   토머스 모어에게 유토피아 얘기를 들려준 포르투갈 선원의 이름. 정확히는 일반적인 뱃사람이라는 의미 보다는 탐험가로 이해 해야 한다.

 

   라파엘Raphael은 히브리어로 〈하느님께서 치유하신다〉라는 의미이다. 『토빗기Book of Tobit』에는 병자와 여행자의 수호신인 대천사 라파엘이 등장하여 토빗의 아들 토비아스Tobias의 여행을 수호하고 맹인 토빗의 눈을 치유하여 준다. 그러므로 사회악의 여러 가지 근원을 볼 수 있도록 사람들의 눈을 뜨게 해주는 역할을 맡은 (작중) 인물의 이름으로 〈라파엘〉은 최적이다. 또한 휘틀로다이우스Hythlodaeus는 그리스어로 〈난센스〉를 의미하는 〈huthlos〉와 〈배포하다〉를 뜻하는 〈daien〉의 합성어이다. 그러므로 주인공의 이름은 〈하느님께서 치유하신다〉이고 성은 〈허튼소리를 퍼뜨리는 사람〉이다. 위트와 조크와 난센스를 통하여 〈치유〉를 제시하는 절묘한 설정이다.

과거에서 온 미래사회 – 유토피아”에 대한 7개의 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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