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가 장애인을 처음 접한 것은 91학년도 입학당시에 밀알동아리에 가입하면서 부터 였습니다.
당시에 동아리에선 인가원에 봉사활동을 정기적으로 나갔는데 그 때 만난 장애인분들이 제 삶에서 첫 경험이 아니었나 싶습니다.
당시에는 장애인들을 직접 만나 소통하는 기회가 적었고, 시설에 수용되어있거나 집에서 지내는 장애인들이 대부분이어서 장애인들이 사회에 나와 활동하기 쉬운 환경이 아니었습니다.
저는 성결교단 출신의 교회를 다니다가 총신대학을 우연한 기회에 오게 되었는데 교회와의 분위기가 많이 달라서 처음에는 적응하기가 쉽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후에는 부흥신학을 공부하고 학생선교사역을 하면서 많은 열매를 맺었는데요. 그래서 저는 일생을 청소년들을 위한 목사가 될 것이라고 생각했었습니다.
그런데 부목사 생활을 거치면서 사역의 시간이 줄어들고 목회적 비전도 희미해졌었습니다. 조금 지쳐있었다고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본격적으로 장애인을 만난 것은 총신대 신학과 91학번 주은미 학우를 만나면서 부터 입니다.
그 당시 제가 부천에서 청소년 [장막]이라는 단체를 운영하고 있었는데요. 이때 주은미 학우를 수련회에 불러 강의를 들으면서 부터 인연이 시작되었습니다.
강의 후에 학생들과 어울리는 시간이 있었는데 그때 자신의 의족을 벗어놓는 것을 보고 놀랐던 경험이 있습니다. 그렇지만 자연스럽게 어울리는 모습을 보니 제 편견이 없어지는 것을 경험할 수 있었습니다. 대학원을 같이 다니면서 자연스럽게 만나게 되었고 그 결과 지금의 잉꼬 부부? 탄생이 되었군요. ^
저는 성결교단 출신의 교회를 다니다가 총신대학을 우연한 기회에 오게 되었는데 교회와 분위기가 많이 달라서 처음에는 적응하기가 쉽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후에는 부흥신학을 공부하고 학생선교사역을 하면서 많은 열매를 맺었는데요. 그래서 저는 일생을 청소년들을 위한 목사가 될 것이라고 생각했었습니다.
그런데 부목사 생활을 거치면서 사역의 시간이 줄어들고 목회적 비전도 희미해졌었습니다. 조금 지쳐있었다고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마흔이 넘어 지금의 혜명교회를 만나고 나서 정착하였습니다.
저희 교회는 발달장애인분들이 두 분 계십니다. 한 분은 지금 교회 예배 반주를 하고 계십니다. 또 아내가 사회복지를 전공하게 되면서 장애인분들과 만날 기회가 많았고, 저희 교회를 거쳐 가는 장애인분들도 많이 계셨습니다. 장애인분들의 자립을 돕다 보니 직업고용에 관심을 많이 갖게 되었습니다.
그런 관심은 인권공부로 연결되었고 자연스럽게 장애인 인권강사가 되었습니다. 이후에 발달장애인을 위한 성교육을 만들어 강의하게 되었고, 직장 내 장애인 인식개선 강사 자격증을 따면서부터 4년간 열심히 많은 사회복지기관들을 찾아다니며 강의를 다녔습니다.
코로나가 시작되면서 강의가 끊겨지면서 강의해왔던 내용들을 되돌아보았습니다.
강사라는 멋진 직업보다는 내가 배우고 실천하던 것을 더 삶으로 실천해 보고자 한 자립생활센터의 뇌병변장애를 갖고 있는 소장님의 활동지원사로 7개월 일할 수 있었습니다. 이분과 함께 시간을 보내면서 장애인활동가들이 어떻게 사회에 문제제기를 하면서 실천해 가는지를 배울 수 있었습니다.
그러던 중에 이사로 활동하고 있는 중증장애인독립생활연대에서 발달장애인분들을 지원하는 사업을 함께 해보자고 제안을 주셔서 이곳으로 작년에 옮겨갔습니다. 강사 활동을 하는 아내를 도우라는 뜻에서 주 4일 근무를 할 수 있도록 배려해 주셨습니다. 이곳은 제 아내가 장애인단체에 첫발을 들인 곳으로 저도 봉사활동으로 오랫동안 활동해왔기 때문에 제겐 의미가 있는 단체였습니다.
이곳에서 부모 없는 발달장애인분들을 지원하는 사업을 새로 개발 할 수 있었는데 장애인분들의 자립생활을 지원하는 의미에서 1박 2일 프로그램을 만들어 지원하였습니다. 시설에서만 계셨던 분들이라서 1박2일 캠프를 해본 적이 없으셔서 연천에 한 캠프장을 빌려 식사와 설거지, 레크레이션, 불꽃놀이와 낚시 등 다양한 활동을 할 수 있도록 하였습니다. 독립연대에서의 1년은 아마 목회에서 받은 모든 상처를 다 치료받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사랑과 축복을 받았습니다.
장애인을 돕는다고 하면 보통은 ‘소진’이라는 단어를 떠올리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저는 오히려 아내를 만나 방황을 끝낼 수 있었고, 많은 장애인분들을 만나 저의 상처가 치료되는 경험을 하였습니다.
그래서 목회하시다가 혹시 어려움을 겪고 계신 분들이 계신다면 장애인 활동지원사부터 해보시라고 강력히 권하여왔습니다.
어찌되었건 다시 밀알로 되돌아왔습니다.
올해 6월부터 밀알의 부름을 받고 장애인인식개선 센터의 센터장을 맡게 되었습니다.
처음에는 완강히 거절하였지만 우리나라에서 발달장애인 예술인들이 발 딛고 살아갈 수 없는 현실을 보고 밀알복지재단으로 오게 되었습니다. 어느새 커버린 밀알복지재단은 청년 때 알고 있던 작은 단체가 아니더군요. 나름 정말 많은 분야를 개척하고 이루어내는 단체로 성장해 있었습니다.
제가 맡은 역할은 클래식을 전공한 발달장애인 예술가들이 활동하는 브릿지온 앙상블 8명과 그림을 전공한 아르떼 작가 4인의 활동을 메니지먼트 하는 일입니다. 한국장애인고용공단으로부터 수탁 받은 사업비로 운영되는 브릿지온 단원들을 밀알복지재단이 고용하여 활동을 지원하고 있습니다.
제 비전은 한국 최초의 장애인 종합예술학교를 세워보는 것입니다. 일을 하다 보니 꿈꾸게 되는군요 ^^.
누군가 소명은 자신의 삶의 그림자 속에 피어난다고 말하더군요.
뒤돌아보니 사람 좋아하는 저에게 하나님이 가장 온전한 사람들을 제게 붙여주셨습니다.
거짓 없이 진실하게 살아가는 그분들과 함께 걸으며 사람됨을 회복하고, 하나님 나라의 회복을 꿈꾸며, 항상 감사하고 기뻐하는 삶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뒤돌아보니 소명으로 다가옵니다. 그래서 다른 소명보다는 이 소명을 더 발전시켜보려고 합니다.
정성우 형님의 오랜 권유을 통해 민동에 들어오게 되었습니다.
과거의 민주화 활동은 전무합니다. 그러나 와서 몇 년 동안 선배님들의 삶을 들여다 보는 재미가 생겼습니다.
말대로 결대로 신앙대로 살아가시는 모습을 오랫동안 옆에서 지켜보고 싶은 욕심이 생겼습니다.
이 글은 그래서 제 소개서가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모든 선배님들과 후배님들의 삶을 응원합니다. 그리고 기회가 될 때 마다 자주 찾아뵙도록 노력하겠습니다.
아 그리고 마지막으로 제가 자전거 보급도 하고 동호회를 만들어 운영도 하고 있어요. 자전거 배우고 싶으신 분들은 언제든 연락주세요. 기초부터 안전하게 취미생활 하실 수 있도록 돕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정목사님, 작년 송년회에 이어 민동 웹진에서 글로 이렇게 또 만나니, 반갑습니다.
무엇보다 많은 동문들이 모인 곳에서는 개인의 삶에 대해 이야기 나누고 이해할 시간이 많이 부족하였는데, 오늘의 글로 인해 정목사님에 대해 많은 것을 알게 되어 너무 기쁘고 장애인을 위한 봉사와 헌신에 큰 박수를 보냅니다.
학교 다닐 때 삶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지금 현재의 삶이 더 중요하며, 서로의 다름을 인정하면서 공존하는 것 또한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렇기에 정목사님의 민동 속으로 스며듬에 감사하고, 그 스며듬의 힘이 그 동안 장애인들과의 어울림 가운데 나온 힘이라 믿습니다.
주은미동문과 함께 장애인과 더불어 함께 하는 삶의 여정에 큰 박수와 응원을 보내며, 기회가 되면 자전거도 배우고 같이 탈 수 있는 기회가 있기를 기대해보겠습니다.
정목사를 만난 지 벌써 30여년이 흘렀네.
과거의 민주화 운동 전력이 뭐 중요한가. 내가 아는 정목사는 참 맑은 영혼의 소유자야.
비록 학생시절 민주화 운동에 참여하지 않았다고 하지만 정목사의 눈에 우리 사회의 부조리가 쉽게 용인 될 수 있는 것은 아니었을 거야.
정목사의 삶이 ‘민주화 운동’에 동참하고 있는 것이라고 생각 해. 명예와 부를 쫓아 위만 바라 보지 않고 늘 주변 사람들과 함께 해 온 정목사의 삶이 우리가 민주화 운동을 했던 참된 이유와 일치 하니까. 앞으로도 잘 부탁 해.. 그리고 ‘천사’같은 은미에게도 안부 전해 줘.
정목사님, 작년 송년회에 이어 민동 웹진에서 글로 이렇게 또 만나니, 반갑습니다.
무엇보다 많은 동문들이 모인 곳에서는 개인의 삶에 대해 이야기 나누고 이해할 시간이 많이 부족하였는데, 오늘의 글로 인해 정목사님에 대해 많은 것을 알게 되어 너무 기쁘고 장애인을 위한 봉사와 헌신에 큰 박수를 보냅니다.
학교 다닐 때 삶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지금 현재의 삶이 더 중요하며, 서로의 다름을 인정하면서 공존하는 것 또한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렇기에 정목사님의 민동 속으로 스며듬에 감사하고, 그 스며듬의 힘이 그 동안 장애인들과의 어울림 가운데 나온 힘이라 믿습니다.
주은미동문과 함께 장애인과 더불어 함께 하는 삶의 여정에 큰 박수와 응원을 보내며, 기회가 되면 자전거도 배우고 같이 탈 수 있는 기회가 있기를 기대해보겠습니다.
정목사를 만난 지 벌써 30여년이 흘렀네.
과거의 민주화 운동 전력이 뭐 중요한가. 내가 아는 정목사는 참 맑은 영혼의 소유자야.
비록 학생시절 민주화 운동에 참여하지 않았다고 하지만 정목사의 눈에 우리 사회의 부조리가 쉽게 용인 될 수 있는 것은 아니었을 거야.
정목사의 삶이 ‘민주화 운동’에 동참하고 있는 것이라고 생각 해. 명예와 부를 쫓아 위만 바라 보지 않고 늘 주변 사람들과 함께 해 온 정목사의 삶이 우리가 민주화 운동을 했던 참된 이유와 일치 하니까. 앞으로도 잘 부탁 해.. 그리고 ‘천사’같은 은미에게도 안부 전해 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