총신 학생운동의 한 자락에 대한 회고(1)
총신 학생운동의 한 자락에 대한 회고(1)
한국 근대 역사 다큐를 함께 보다가 막내가 불쑥 질문을 던졌습니다. “아버지는 그때 뭐하셨어요? ” “ 음. 뭐했지? ” 최소한 이 물음에 내가 진실되게 답해야 한다는 생각에 한참이나 머뭇거리며 기억을 되새겼습니다. 혹 같은 질문을 후배가 그 때 뭐하셨어요라고 하면 더 곤혹스러웠을 것입니다. 선배들이 뭐 했길래 지금 총신이 이 모양이냐는 힐난처럼 느껴질 수 있을 듯합니다.
마침 총신대민주동문회가 의욕적으로 웹진을 발간하면서 80년대 초의 학교 이야기에 대한 원고를 의뢰해서 뭐 있는 그대로 당시의 이야기를 담담하게 정리하면 되겠다 싶어 동의를 해놓고 막상 글을 쓰려니 어느 하나 확실하게 글로 남길 수 있는 것들이 참으로 애매하게 기억되어서 난감합니다. 이참에 본격적으로 총신대 학생운동사를 정리하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지만 막상 글을 써보려고 하니 엄두가 나지 않습니다. 돌이켜보니 40년이나 지난 일들입니다. 총신대 민주화운동에 대해 줄거리라도 정리할 수 있겠다 했는데 쓰다 보니 불가능한 일이었습니다. 1980년대 초반에 총신대학을 다니면서 고민하고 사람을 만나고 했던 모든 일들이 모두 꿈결 같이 아스라이 남아 있는데 무엇 하나 뚜렷하게 기억되지 않고 막연한 느낌과 뒤죽박죽 섞여서 글로 어떤 역사를 기록한다는 것이 가당치 않다는 것을 느낍니다.
그래서 제가 80년대 초기 총신의 민주화운동 역사를 기록하는데 지극히 작은 벽돌 하나 놓는 심정으로 소박하게 글을 써야할 것 같습니다. 역사적인 일을 증언하고 기록으로 남기는 것은 대단히 중요하고 진지한 일이고 자랑삼아 과장하거나 왜곡하지 않도록 삼가야겠지요. 어쩌면 저보다 훨씬 더 많은 기억과 기록들, 그리고 다양한 내용들을 알고 있고 증언할 수 있는 여러 선후배님을 위해 제가 문을 여는 역할이라도 잘 하면 좋겠습니다. 괜한 무용담으로 흐르지 않도록 그리고 과장과 편견도 조심하면서 써보려고 합니다.
1.장로교 대분열의 시대와 총신대 학내 사태
저의 총신대 학창시절은 대학 4년간에 신학대학원(야간–사당동)2학기까지 1980년부터 1984년까지 5년간 이어졌습니다. 그리고 1985년에는 대학원을 휴학한 상태에서 사당동캠퍼스에 남아 후배들과 만나고 개인의 진로를 여러 가지로 모색하다가 12월 경 강원도 태백 탄광지역으로 내려갔습니다.
사실 저의 대학1학년과 2학년 시기는 좌충우돌하면서 학내외를 쫒아 다니며 이것저것 배우고 경험했던 시기라 지극히 주관적인 경험 이야기를 할 수 밖에 없고 당시 보고 들었던 여러 가지 사건이나 흐름에 대해서도 피상적인 이야기에 그칠 것이라는 것을 전제해야할 것입니다.
대학1학년 때인 1980년은 혼란 그 자체였습니다. 이미 79년 가을에 합동교단이 주류와 비주류로 교단이 분열되었고 총신대생들의 격렬한 항의가 있었지만 아무 것도 달라진 것 없이 1980년을 맞았고 80년 3월 입학식을 하는 날부터 자그마한 캠퍼스는 소란하기 그지 없어 그저 순수한 마음과 신앙적 열정으로 총신대에 입학한 저로서는 엄청 당황스러운 상황을 만났습니다. 선배들이 교단문제와 소위 정치목사, 정치장로의 전횡과 횡포에 대해 분노하는 이유를 체감으로 느끼지는 못했습니다. 유리창을 박살내고 차량도 부수는 일이 일어날 정도로 학내 분위기는 살벌했습니다. 학도호국단을 해체하고 총학생회를 부활시켜서 총학생회가 집회를 주도하기 시작했습니다. 총신대에서 학교 개교이래 처음으로 민주화운동이 일어난 것입니다. 1학년으로 호기심 많고 갈급했던 저로서는 학내 집회에도 부지런히 참여했습니다. 자연스럽게 학교 수업은 등한시하게 되었고 학내외 데모나 여러 집회를 쫒아 다녔습니다. 사실 수업도 불안정한 시국과 학내사태로 인해 종종 휴강을 하거나 집중하기 어려운 조건이기도 했습니다. 입학식을 한지 한달도 않된 3월 25일에는 신학과 자체적으로 수업거부를 결의했고 26일에는 총학생회의 주도아래 학장실을 점거농성도 했습니다. 그 결과인지 3월28일에 당시 김희보 학장이 사임하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4월6일 까지 임시휴강에 들어갔습니다. 4.19 기념예배를 드리기도 했는데 ( 총학생회가 주도했는지 기억이 나질 않음) 예배 후에 자연스럽게 ( 누군가 계획을 했겠지만 ) 당시 합동교단과 총신대를 쥐락펴락하며 여러 문제를 일으키고 원성이 자자하던 소위 정치꾼 이영수 목사의 퇴진을 요구하는 철야농성에 들어갔고 이사회를 위해 모였던 총신대이사회 이사들을 도서관에 감금하는 일도 벌어졌습니다. 그 결과 4월18일에 이사회에서 전체 이사 총사퇴를 결의했지만 정작 가장 퇴진을 요구했던 이영수 목사는 퇴진 하지 않았습니다. 학내문제가 한계에 부딪히면서 오히려 학생들의 분노는 학외로 방향을 틀었습니다.
저로서는 1학년으로 평소 교단에 관심을 가질만한 것이 없어서 학내 문제도 흐름을 잘 파악하기 어려웠고 그저 답답한 마음이 컸던 것 같습니다. 그렇지만 기숙사에 들어간 덕분에 답답한 학내현실 속에서도 나름 작은 해방구를 통해 다양한 선배들을 만나고 많은 정보들을 들을 수 있었습니다. 학내 문제 뿐 아니라 당시 전국적으로 진행된 민주화의 봄의 전후 배경에 대해서도 귀동냥을 할 수 있었고 관련책 책자나 자료에 대한 소개도 얻을 수 있었습니다. 간간히 학대 대자보로 붙은 타임지나 뉴스위크지에 실린 전두환 관련 기사나 12.12 쿠데타 기사도 눈여겨 보고 선배들을 통해 학교에서 배우지 못했던 역사 이야기를 들으면서 엄청난 역사의 배신감과 충격을 느꼈습니다.
민주화의 봄이 정점으로 다가가면서 총신대 안에서도 시위가 벌어졌습니다. 비아돌로사라는 단체가 5월2일에 시국관련 집회를 열었는데 10여명이 모여서 시국을 성토하는 조촐한 모습이었지만 저도 관심있어 곁에 앉아있었던 기억이 납니다. 5월 12일에는 누가 주최했는지 기억나지 않지만 교내에서 시국좌담회 같은 토론회가 열렸는데 경찰차 2대가 학교정문앞으로 출동하기도 했습니다. 특별한 충돌은 없었습니다. 저도 뭔지 잘 모르지만 열심히 쫒아 다니며 귀동냥으로 듣고 이제까지 교과서로만 배우던 세상을 새롭게 보기 시작했습니다.
본격적으로 5월 중순부터 각 대학에서 시위대가 가두로 진출하기 시작했고 그 때 총신대도 다른 신학대와 연계를 하고 있었는지 5월 15일 대규모 시위에 참여하게 되었습니다. 저도 신학대학생들의 집결지로 전해들은 새문안교회에 가보니 수백명의 신학대생들이 모였고 총신대 선배님들도 많이 보였습니다. 신학대생 시위대가 새문안교회에서 출발해 광화문 사거리로 진출해서 중앙청을 바라보니 엄청난 경찰병력이 각종 진압차량과 함께 중무장해서 도열해있었습니다. 처음 보는 살벌한 광경에 섬찟했습니다. 우리는 서울역쪽으로 다 모인다는 소식에 서울역쪽으로 방향을 틀었습니다. 서울역 앞 광장에 도착했을 때 묘하게도 신학대생 연합모임이 비교적 일찍 도착한 셈이 되었습니다. 이후 사방에서 물밀 듯이 학생들이 몰려들어와 서울역 광장을 넘어 남대문까지 모든 도로는 10만이 넘는 대규모 시위군중으로 빼곡이 차게 되었고 오도가도 못하는 시내버스와 차량들이 중간에 뒤엉켜 있었습니다. 어떤 체계적인 지휘 체계가 없어서 다소 우왕좌왕하다가 신학대학생 모임은 전체가 남대문을 거쳐 청와대쪽으로 진군해 나갈 때 맨 앞쪽에 있다가 서소문쪽으로 방향을 틀어서 서소문고가도로에서 홍익대생들과 외대 학생들과 합류해서 저녁 늦게까지 경찰과 공방을 벌였습니다. 9시 30분쯤 경찰차에 밀려서 강제해산을 하게 되었는데 총신대생 몇 명도 부상을 입었고 저도 손에 돌을 맞아 부상을 당하기도 했습니다. 이 후 비상계엄이 선포되고 학교는 폐쇄되어 9월에 2학기 개학할때까지 모든 것이 정지된 느낌으로 조용히 숨죽여 살았습니다.
광주항쟁이 무참히 진압되고 있는지도 모르고 저는 계엄령 하에서 고향 일산으로 내려가 머물다가 2학기 개학과 함께 다시 학교 기숙사로 돌아왔습니다. 그때부터 저의 관심은 온통 총신대 밖으로 쏠렸습니다. 학교 수업도 재미없었고 시시하게 느껴졌습니다. 한마디로 모든 것이 무기력해 보였습니다. 모세오경을 모세가 썼다고 주장하고 성경 한자 한자가 축자영감을 받은 것이라는 총신대의 핵심적인 가르침도 이미 내 관심영역이 아니었습니다. 기숙사에서 여러 선배들이 조언해준 각종 사회과학책들, 철학책들을 탐독하기 시작했고 명동성당 가까이에 있는 YWCA 회관이나 종로5가 기독교회관에서 열리는 신학강좌에도 열심히 다녔습니다. 저와 친하게 지낸 총신 선배님들은 하나같이 합동교단에 더 이상 희망이 없고 총신대도 배울 것이 없다고 절망적인 이야기를 많이 했고 나에게도 교단에 미련을 갖지 말라고 충고를 많이 했습니다. 그때 들었던 이야기가 ‘합동에서 어찌 선한 것이 나겠느냐?’(요한복음1:46절 패러디). 그 이야기 때문인지 저는 학내보다는 외부로만 자꾸 나가게 되었습니다.
80년과 81년 1,2학년 기간에 저로서는 기존의 가치체계가 무너지는 곳에 새롭게 무엇인가를 채워야하는 갈급함으로 온갖 다양한 정보와 지식들을 무차별 흡입했던 시기였고 총신내 내부는 어떤 공백상태, 진공상태 처럼 느껴지는 어수선하고 중심 없는 시기였다고 기억합니다. (계속)
글 : 원기준(신학 80) / 현 ‘따듯한 한반도 사랑의 연탄나눔 운동’에서 근무